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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Sep 12. 2021

바다 빛 당신 9. 말과 삶의 무게

9.  말과 삶의 무게

 

1944년. 7월.     

부러울 것이 없다. 가지고 싶은 것도 없다. 아침 햇살처럼 가볍고 샘물처럼 정결한 마음으로 스타시오를 선다. 거룩하신 창조주께 합당한 마음가짐으로 미사참례를 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서기 전, 수도자들이 2열로 선 채 묵상의 시간을 가지는 베네딕도회의 전통.     


연로하신 사무엘 아빠스님께선 미리 성전에 앉아 계시고, 홍태화 원장 수사님이 아빠스 대행으로 스타시오의 선두에서 걸음을 옮기면, 뒤이어 수도회 형제들과 수련 수사들, 수도회 입회 지원자들이 성전으로 들어선다. 수도복을 정갈히 하고 착석한 후 그레고리안식 음률에 맞추어 부르는 찬미가. 선창자와 후창자가 대송하며 주고받는 성무일도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노래다.       

  

동길은 공동체가 함께 바치는 찬미가에 자신의 목소리를 합하는 이 시간이 좋다. 도랑물이 시냇가에, 시냇물이 강물에, 강물이 바다에 흘러드는 것 같이, 수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가 노래 속에 어우러져 세상의 바다로 흘러간다. 세상 사람들의 기도가 하나 둘 모여서 하늘로 올라가듯이.


공동기도이면서 개별 기도이기도 한 이 기도 안에서 모든 것이 조화롭게 순환한다. 모두가 같은 말로 함께 노래하는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마음은 광대무변의 평화에 잠긴다.        


기도 중에. 선명하고 싱그러운 자연풍경을 보기도 하고, 성령의 바람을 맞고, 진한 꽃향기를 들이마시기도 한다. 함께하는 수도자들의 밝음과 평화에 젖어들면서 동길도 초월적인 신비들을 감각으로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체험들은 정감이 되어 사랑이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기도를 통해. 미리 천국을 맛 본 동길은 어린잎처럼 다정다감한 마음으로.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육체적 근면함에, 철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초월적 신비에 도달하는 신학교의 교육 과정이 ‘기도하고 일하라.’ 하신 베네딕도 사부의 한마디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은 차라리 신비다. 모든 초월적인 것들이 구체적인 경건함 안에서 발현되는 것을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음은 신의 선물이다.    



일본 당국의 명령에 따라, 수업 대신 근로봉사라는 이름의 노동착취가 빈번해진 이 해에 동길은 더욱 깊은 체험 속으로 들어갔다. 길 닦기, 모내기, 저수지 파기 같은 마을 일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심지어 신사(神社) 참배를 위한 사당 공사의 정지 작업까지. 일본인들이 상투 잡고 흔드는 일에는, 아무리 성덕에 진보하려는 인간이라도 버틸 방도가 없다.   



“불의에 항거하다가 자신들의 나라로 추방당한 외국인 선교사들이 의로운 걸까? 끝까지 조선에 남아서 귀신들을 위한 신사나 짓고 있는 외국인 수도자들이 의로울까? 이제 개신교는 반항의 대가로 추방되었고, 가톨릭은 대놓고 반항하지 않는 기조라도 유지하기 위해 뭉근히 협조해야 살아남는다. 결국 이 시국에 종교가 무슨 소용일까?”   

 


강제 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밤에 태주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꺼내 들었다. 고된 노동에 지쳐 잠든 어린 신학생들 빼고, 머리가 좀 굵은 수련 동기들이 처음엔 제각각 반응했다. ‘판단은 하느님의 것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등등.


 그러나, 태주의 딴지 걸기가 밤마다 계속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매미들만 울어대는 한 여름의 땡볕 아래. 일본의 강제 노역 속에서 눈에 띄게 메말라가는 사람은 태주가 되었다. 화초처럼 자란 태주는 하느님을 위한 굶주림과 고통을 견딜힘은 있어도, 우상을 섬기는 일에 동원될 힘은 없었다. 아닌 것도 긴 것으로 받아먹어야 하는 일이, 유태주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동길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꺼냈다.   


“태풍에 뿌리가 뽑히는 것은 소나무고,

 흔들리는 것은 갈대지만

 끄떡도 없는 건 잡초래. “   


태주는 심드렁하니 다른 얘기를 했다.   


“... 그러니 문제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이

문자가 아니라 삶에 있다는 거다. 베드로.”   


스스로 내뱉은 말에 잠겨 들 듯 태주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말로 논쟁하는 것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늘 장난기 어린 녀석의 모습이 그때부터 단단해졌다.


 이제는 녀석의 끝말만 들어도 하지 않은 뒷말까지 이해하게 된 동길은 태주가 화두로 삶고 있는 그것을 자신도 같이 고민하게 되었다.   


- 문자 대신 삶-   



삶.     

동길은 아직까지 문자와 삶이 별개라고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일상이 수많은 문자에 둘러싸여 있고, 참으로 많은 교육을 통해 자신의 두뇌가 타인의 문자와 들을 만한 말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배움의 과정을 지나야 만 진짜 사제가 된다. 참 사제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삶이 아닌가?        


동길은 누구보다 이 삶을 만족했다. 동해 문화 집에서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삶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신학생이 되려고 여기에 모인 우리들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특별한 소명이 있었기에, 그 별 빛을 따라만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부 베네딕도로부터 1500년을 내려오며 굳어진 수도회 규율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덕에 이르고자. 수도 규칙을 통해. 인간의 몸과 마음에 그리스도적인 모습이 습관으로 새겨질 때까지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 지금 여기. 덕원 수도원 학생 기숙사에 살고 있는 우리의 소명이다. 그렇게 수련 기를 거친 후 사제가 되고 나면, 살라고 주신 몸을 미리 수도복 속에서 죽이고, 타인의 순간적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일을 죽기까지 하는 것. 그리하여, 신이며 인간이신 예수님의 참 사랑을 조금이라도 닮아서,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일이 우리들의 평생의 업이 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태주는 그 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너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 그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토론해 볼 때면, 동길이나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들고 주리고, 갇히고, 억눌린 사람들을 말했다. 식민지 조선의 민초들이 우리들의 사랑의 대상자들이었다. 거기엔, 어쩔 수 없는 선민의식도 깔려 있었다.    


일본의 강제 부역으로 그들과 노동의 현장에 같이 끌려 나와 살을 맞대고 일하기 전에는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주의자들처럼, 농촌 계몽운동이니, 브나로드 운동이니 하며 타인을 문명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것이 수도생활은 분명 아니지만, 우리들의 속에는, 언젠가 이 고통받는 민초들을 위해 생수를 먹여 줄 사람이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우월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햇볕 아래 모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땀 냄새를 풍겨대면서 일하는 동안, 동길은 참으로 별것 아닌 자기애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 배운 지식으로 문명화된 조선인과 그렇지 못한 조선인 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잡초든, 갈대든, 상록수든, 사람의 조건이나 성질의 차이 따위는 하느님 앞에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숭고하고 고결해 보이는 상록수의 길이 잡초의 길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잡초라고 불러대는 그 길이 사실은 상록수의 길일 수도 있다. 어쩌면 또한 상록수니, 잡초니 스스로 붙인 이름에다가, 관념적 판단까지 덧붙이는 것이 인간의 죄인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동길은 이미 고된 노동으로 몸이 너무나 피곤해 복잡한 사유까지 올라가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잠이 쏟아진다. 그러면 그저, 올라가기를 그만두고 겸손의 덕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가지고 싶은 생각 밖에는 남지 않는다.

     

누구도 굶은 적 없지만, 식탁을 떠날 때조차 배가 고픈, 베네딕도 수도회 선배들의 ‘겸손’. 그것 만이라도 제 몸에 습관처럼 베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죽기까지 과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끝도 없이 들이닥치는 가난뱅이들에게 헌신을 하다가 결국엔 병석에 눕고 마는 가난뱅이 선배들. 자신은 제대로 된 속옷 하나 구비하지 못한 채,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먹이고 입히고 위로하는 삶의 반복. 벗어서 버리고, 벗어서 버리고 해도, 늘 새로 들이치는 굶주림 앞에서, 불평이 뱃속에서 꼬륵 대는 것은 아직 ‘겸손’이 몸에 베이지 않은 탓이리라. 겨우, 그런 생각이나 설핏하다가는 육체의 허약함에 못 이겨 잠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미사는 차라리 위로의 시간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육체의 요구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내 힘으로 물을 길어 언제나 빠지고 마는 물독에다가 붓는 것이 아니라, 강물처럼 흐르는 주님의 평화 속에 밑 빠진 물독인 내 몸 자체를 던져 버리는.

미사는 그야말로 오롯이 영혼을 위해 주어진 평화의 시간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사람들의 공동 기도에.

친히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은총과 사랑을 부어 주시는 신비의 현장.

오! 거룩한 미사여.

이 세상 무엇으로도 파괴될 수 없는 평화의 약속이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미사 중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한 천상의 신비 속으로 동길이 자신을 맡겨 갈 때, 강론대에 선 홍태화 원장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평화는 여기 모여 기도하는 우리들만의 소유입니까?”   


동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분의 힘 있는 말씀이, 갑자기 박자가 달라진 노래처럼, 우리들의 평화로운 시간을 깨 나갔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제 조국, 독일이라는 몰록(moloch: 재앙의 신)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습니다. 남자 어른들로도 모자라 어린이까지 군대의 희생양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일본도 규모가 있는 조선의 모든 기업들을 잡아먹었습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박탈당했고, 거리마다 굶주림뿐입니다.

기차역마다 여러분의 자녀들, 어린 소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

총칼로 무장한 일본 군인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평화의 바다에 잠기려는 밑 빠진 독을, 원장 수사님이 굳이 끄집어내 물 밖으로 던진 이유를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동방의 고요한 나라, 조선의 덕원리에서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히틀러 총통이 들을 리도 없고, 일본의 천황이 알아먹을 리도 없다.


그런데, 수도원장이. 위험하게도. 평신도들이 참례하는 주일 미사의 강론 대에서. 독일을 비난하고, 일본을 모독하는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지켜 오던 일본 당국과 독일 수도원의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었고, 오갈 곳 없던 조선인들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루치오 원장 수사님의 말이 조마조마해서 계속 들을 수 있을까 신자들이 걱정 되었지만, 일견 속이 시원한 어른들도 많았던 듯 옳소!라는 외침도 신자석에서 터져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원장 수사님은 강론을 다 마치기도 전에 지켜보던 일본군에 의해 제어되었고 양 팔을 잡힌 채 성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주님의 제단까지 군홧발이 올라온 충격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미사는 안셀모 로머 학장님의 주도로 올려졌다.       

  

“홍태화 원장 수사님은 별일 없을 겁니다.

내어 놓은 말에 대한 무게를 책임지러 가신 거니까요.”   


동요하는 신자들에게 한국말로 로머 학장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로 장내는 다시 경건해졌고 수도원의 라틴어 미사는 그대로 이어졌다.


안셀모 로머 학장 신부님과 선배 수도자들의 침착한 태도로 보아서 원장 수사님께서 강론하실 말씀은 미리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던져진 말이었는지는 아직 헤아릴 수 없었지만.  



총칼을 찬 일본군들은  원장님의 말에 책임을 지울 수는 있었지만, 1500년이라는 뿌리 위에 세워진 이 수도 신학원의 삶을 베어버릴 힘은 없었던 같았다. 그리보면 삶의 무게가 말의 무게보다는 훨씬 큰 것 같다.    


그러나, 정해진 형식 안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있는 우리들의 내부에는 이미 미사 중에 수도 없이 쓰고 쓰이는  평화라는 말에 대한 의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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