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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쁜 이야기 Sep 28. 2021

바다 빛 당신 11. 겨울의 온기

11. 겨울의 온기

  

 1944. 12.      

  

  

신문이 폐간된 지 몇 해 전이라, 세상 소식은 외국 라디오의 주파수를 몰래 잡아 듣거나, 독일 수사님들의 고향에서 보내주는 선물 속에 포함된 외국 신문들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알게 된다. 나치군의 정세와 최신 무기들에 대한 정보들이 실린 독일 신문에서, 치호 형이 일본의 기사를 한 줄 찾아냈다.


정확히는 조선의 정세였다.         


‘미군의 참전으로 동아시아에서 악전고투 중인 일본이 더 많은 식민지 노예들을 필요로 한다. 탄광과 무기 공장, 사할린, 동남아 남양군도로 끌려가는 조선인의 수가 이미 백만 명에 이르고 있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굳이 덕원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요.”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님이 방학식 때 학생들에게 강복하시며 당부하신 말씀이다. 수도원 건물이 곧 징발될 거라는 소식과 함께, 방학이 끝나자마자 천막살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부담이 느껴진다면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는 진심을 전하신 것이다.  심각한 일도 별일 아닌 일로 넘기실 수 있는 아빠스님의 넉넉함마저 초라해진 겨울 방학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 혼자 남은 동길은, 수사님들의 일상을 따라 움직이며 조금 더 수도자다운 단순함을 맛보게 되었다. 건물 징발이라는 예민한 문제를 앞두고 일본인들은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 를 허락해 주는 일본식 친절을 베풀었다.  침몰을 눈앞에 둔 수도원 사람들은  담담히 일상을 회복했다. 이런 시련과 역경은 처음이지만 동길 역시 선배들을 따라 침잠의 담대함을 살아보기로 한다. 당국의 노역에 동원되거나 체육 활동, 각종 신학, 철학, 어학, 예술 수업으로 뺑뺑이를 돌던 학예 일정이 빠져나가니,  겨울이 더욱 고요해진다.         



수도 선배들은 목공소, 철공소, 구둣방, 재봉방, 농원, 정원, 주방, 관리소, 병실, 문간, 출판소 등에서 각자의 맡은 바 소임을 하다가 종소리와 함께 공동 기도에 들어간다. 기도 후 묵상 그리고 다시 소임. 식사하고 잠드는 것 이외에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 전부인 날들의 반복. 겨울이 가져다주는 고요 속에서 선배들이 정주(定住)의 덕행을 쌓아 갈 때, 동길은 쏟아지는 잠과 사투를 벌인다. 단순함 속에서도 명징하게 깨어 있기란 보통의 정신으로는 불가능하다 것을 체감하며 끝없이 육체의 요구를 들어주고 마는 것이다.   


     

매서운 추위 탓에 조금 더 자고, 조금 더 눕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이건만. 홍태화 원장 수사님과  마르코 수사님은 겨울마다 재미있는 경쟁을 하신다.     

   

 30년 넘게 수도원을 깨끗이 청소하고, 겨울이면 전기난로와 석탄 따위를 준비해 온 마르코 수사님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 기도 시간 전에 모든 방에 석탄불을 피우신다.   

  

반면, 필기대에서 서서 일하시는 홍태화 원장님은 난로에 무심하여, 꺼지면 꺼지는 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추위도 아랑곳없으신 그분이 방을 나가면 마르코 수사님이 꺼진 난로를 발견하고는 일만 하는 원장 신부가 춥지 않도록 또다시 석탄불을 피우는데, 원장 신부님은 피워진 난로는 어쩔 수 없지만, 꺼진 난로에 대해서는 언제나 따뜻한 방을 포기해 버리는 쪽을 택하신단다.     



치호 형이 들려준 이야기를 동길은 편지로 써서 친구에게 보낸다. 태주는 수도원을 나가서 유 박사님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녀석이 수도자석 대신에 신자석에 앉아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의료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동길과 수도 선배들이 모두 따뜻한 포옹으로 축하해주었다.    


“꼭 조국으로 다시 돌아올게.”    


다짐하는 태주의 말에 동길도 굳세게 손을 잡아 주었다.


“요셉 수사님 옆을 지키며 기다리고 있으마.

 돌아오면, 내가 너를 간호 보조할 테니 우린 서로 할 일이 많겠지.”     


친구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다른 길을 가지만 함께 한다는 마음으로.  

      

이곳에서는 헤어짐과 만남이 생각보다 많다. 함께 생활하고 기도하다가 원장 신부님의 명에 따라 연길, 평양, 간도 등의 선교 지역으로 떠나시는 수사님들도 많고,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갔다가 오지 않는 신학생들도 있다.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드나드는 신자들과 환자들, 손님에, 인부들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된다.      

   

수도원에서는 사람들을 보내고 맞이할 때마다 평화를 빌고, 따뜻하게 안아 준다. 길이 다를 뿐 언젠가 다시 만날 내 형제, 자매라는 확신을 부드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내 집에 오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 처음 요셉 수사님을 보았을 때, 신비라고 여겼던, 그 만남과 헤어짐의 자연스러운 태도를 배우고 나자, 동길도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부담이 되지 않았고, 마음자리에 크게 살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상처로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친구 태주와 제법 의젓하게 헤어졌던 때를 회상하노라면, 동순이를 떠나 올 때 자신이 얼마나 갑작스럽게 해치워 버렸는지를 반성하게 된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동생을 그렇게 두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품위를 깨달았구나.”   

 

성탄절 합동 연주를 준비하면서, 동길이가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자 치호 형이 한 말이다.  

   

“사람의 품위요?”    


평화라는 말을 요셉 수사님을 통해 들었을 때처럼, 사람의 품위라는 단어가 또 한 번 파도처럼 동길에게 밀려들었다. 양장을 차려 입고, 머리에 서퇴가 끼지 않게 깨끗이 씻은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품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시대의 품위란 조선 양반들의 품위에서 계몽인의 품위나, 모던 보이들의 품위로 옮아 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단순히 ‘사람의 품위’라고 말을 바꾸니, 동길은 번갯불에 콩이 튀긴 듯 놀라는 것이다. 번득 소금을 내려놓고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치호 형을 마주 본다.   

  

“맞아요. 그리스도인은 다 품위가 있어요.”     


정말 그랬다. 굶주린 식탁에, 몇 번을 기워 입은 수도복이 전부여도. 수도원 형제들 에겐 품위가 있었다. 모든 안 좋은 일도 괜찮게 보이게 하실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지고 계신 사무엘 아빠스님부터, 자기 절제와 타인에 대한 배려로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홍태화 원장 수사님. 환자들을 고치면서 정신적인 상처까지도 치유해 주시는 요셉 수사님. 힘든 식당 일을 20년 넘게 맡아하시면서 딱 한 번 탄 감자를 내어 놓아 형제들의 입에 오르신 바실리오 수사님, 전국의 수도 공동체들의 집수리와 빵을 굽는 오븐 설치를 하러 다니시는 힐라리오 수사님, 30년 동안 단 한 번도 수도원을 떠난 적 없이 붙박이 가구처럼 수도원을 청소하고 쓸고 닦으며 환갑을 넘기신 마르코 수사님, 한국인 신학생들을 40명 넘게 사제로 키워 내신 안셀모 로머 학장 신부님, 구둣방, 인쇄소, 신학생 사감, 식자실 작업반장 등 필요한 곳은 어디나 들어가서 일을 해낼 수 있는 팔방미인 루도비코 피셔 수사님 등등. 모두들 개성과 재능은 외모처럼 제각각이지만, 기본적인 성품에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어떤 품위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계신다.        


아이의 선한 마음과 어른의 완숙한 지혜로 공동체에 필요한 일을 원만히 해내는 능력. 수 십 년 전 배를 타고 조선에 도착한 독일 청년들이 식민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조선 학생들이 꿈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역의 경제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건사한 수백 가지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수도회는 하느님의 착한 군대라는 말이 떠오를 지경이다.     


평생을. 청빈. 정결. 순명할 것을 서약함으로써 사람들의 양식이 될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 그 누룩들이 가지고 있는 품위가 진짜 사람의 품위가 아닐까?    


“저런. 더 묵상해 봐.”     


동길이 있는 힘껏 수도자에 대한 자부심을 쏟아내자, 치호 형이 부정한다.



동길은 고개를 갸웃한다. 교만으로 비친 것일까? 치호 형은 이번에도 입을 다문다. 정답을 말해 줄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에 동길은 더 캐물을 수 없다. “사람의 품위.” 그 단어가 밀어다 준 충격에 대해서는 알아서 찾아야 할 것이다.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

                .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주 예수 나신 밤.

  그의 얼굴 광채가 세상 빛이 되셨네.

  왕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동길의 소금과 치호 형의 피아노에 신자들의 목소리가 합해진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주먹만 한 아기가 되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리셨다는. 성탄절.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축하하기 위해 신자들도 눈길을 마다하지 않고 성전으로 모여 왔다. 올해 말 까지 이 수도원 건물을 일본군에게 비워줘야 하니까, 어쩌면 우리들에겐 마지막 성탄절이 될지도 몰랐다.       



홍태화 원장 수사님은 지난해보다 사정이 혹독해진 올해, 더 단단해진 강론을 꺼내셨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보호 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내어 맡겨진 채 자라셨으며, 결국 사람들이 준비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평화는 세상이 생각하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우리가 그분을 믿는 것과 같이, 그분 또한 우리 인간을 죽기까지 믿으셨음을 기억하자고.       


   

이 말의 반이라도 그들이 알아들었을까? 일본인들이 알아들었다면, 당장 얼굴을 붉히고 수치감에 도망쳤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동길은 수도자 석에서 성전의 문을 지키고 있는 일본군들의 얼굴을 흘깃 본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에도 평화가... 있다.         


동길은 새삼 놀라서 다시 본다. 그들에게도, 정말 있다.

고요하고 따뜻한 이 밤의 온기에 젖어드는 아기 같은 얼굴이.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포대자루를 둘러쓰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평화와 고요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인간이란 원래 그러한 것처럼.     

   

변변찮은 겨울옷도 없이, 홑저고리에도 눈발을 뚫고 성전을 찾은 신도들부터, 기도와 수행으로 정결히 하느님을 섬기는 수도자뿐 아니라, 일본제국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돕고 있는 군인들에게 까지 따스함은 감돌고 있었다. 무시하고 싶었던. 나쁜 나라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에게도 온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만연하는 차가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믿고, 아기의 몸으로 자신을 맡기셨던 사람의 온기가.    


    

들치던 눈보라가 성글어지고,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동길은 결국 기숙 소를 나왔다. 해가 새로 솟아날 때까지. 동길은 수도원 밖에서 뜬 눈으로 지새웠다. 추위만 들이닥치면 난로가 피워진 방 안에서 그렇게나 졸아대던 육체가. 아예 추위 속으로 자신을 던져 버리자, 생생히 깨어났다.   


  

동길은 지금. 수도원 눈길 아래서 평화의 사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탐구 중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탄절을 기념케 하고, 누구보다 가난을 기쁨으로 사신 그분이 말하는 평화가 무엇인지. 온 세상 만물에서 하느님을 보았다던 그 경지가 무엇인지 생각 중이다. 성탄절 미사 중에 보았던 모. 든. 사람의 온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품위를 가지고 있다면,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떠나온 그 세계. 도무지 무책임한 아버지와 남의 피를 빤 돈으로 일신의 안위나 채우는 속을 예술로 포장하며 살아온 문어 엄마에게도 사람의 품위가 있는 것일까?        



아버지와 화해하고, 문어 엄마를 내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동순이와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다시 온전한 가족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쉽지 않았다. 몇 백번을 생각해도 쉽지 않았다. 속이 좁쌀 만 한 놈이라고 스스로를 욕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죄와 화해,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 중에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더듬어가며 시간과 추위를 초월해 버린 동길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감기 들라.”     


마르코 수사님이었다. 환갑이 넘도록 누구의 눈에도 특별한 수도자로 띄지 않으신, 건물의 청소와 관리자로 평생을 살아오신 분.    


동길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들키고만. 매우 심각한 깨달음에 통달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겨울이 오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모든 수도자들의 방을 따뜻하게 지피시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 오신 그분 앞에, 자신의 밤을 새운 고민이란 얼마나 차가운 계산인지.   

  

“들어가자.”     


오늘은 수사님이 일상적으로 행하던 순서를 바꾸어, 동길의 방에 있는 난로를 가장 먼저 지펴 주셨다. 마르코 수사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러 떠나신 후, 동길의 방안에 난로의 온기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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