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이제야 당신의 화가 ‘외로움’이었음을 압니다

by 펠렉스

아버님, 당신이 세상을 떠나신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다 된 4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일궈내신 당신의 일가는 이제 50여 명에 달하는 대가족이 되었고,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당신의 손을 잡았던 그 꼬마 장남은 어느덧 종심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따라 당신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제가 당신이 떠나신 그 나이가 되어보니 이제야 당신의 뒷모습이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의 ‘화’는 삶을 지켜내기 위한 처절한 요새였습니다

내 기억 속의 아버님은 늘 무서웠고, 항상 화가 나 있는 분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엔 그 엄격함이 서운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아파 밤잠을 설쳐보고, 장남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려 몸부림쳐보니 알겠습니다. 육 남매를 굶기지 않고 가르치기 위해 당신이 짊어졌을 삶의 무게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말입니다.

"돈 들어간다, 수술은 절대 안 한다.""이 땅은 너희들 것이니, 내 혼자 살자고 절대 안 판다."

그 고집스러웠던 말씀들이 사실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질 자식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줄을 깎아 만든 마지막 보루였다는 것을요. 그 땅이 토대가 되어 우리 육 남매가 일어섰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유산으로 인해 형제간에 6~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등을 지고 사는 참담한 아픔도 겪었지만, 그 또한 당신이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터전’에 대한 무게였음을 이제는 압니다.

무너진 장남의 자존심, 그리고 아버님의 이름

아버님, 저는 아버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네가 잘돼야 집안이 선다"라고 늘 말씀하셨지만, 무능한 이 장남은 집안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36대 장손이라는 자부심으로 건설 현장의 기사부터 시작해 10년 만에 임원이 되고, 아파트 사업 시행까지 하며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제 발아래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딸아이의 40년 넘는 투병과 20년 전의 파산은 저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습니다. 형제들은 장남의 말에 불신을 품고, 일가친척들은 냉랭해졌습니다. 아버님이 계셨더라면, 아무리 늙고 병들었어도 당신이 중심을 잡아주셨더라면 집안이 이토록 서먹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당신의 역할을 대신해보려 했던 제 오만함이 얼마나 우스운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아내에게 돈 한 푼 얻어 쓰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 해묵은 이력서를 들고 다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동 O건설, 진 O기업, 두 O종합건설을 거치며 쌓았던 화려한 경륜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그저 바랜 기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돕듯 (주) 에이프러스씨엠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인 대학 동기의 배려로 다시 감리원이라는 소중한 직함을 얻었습니다. 이 나이에 다시 현장을 지킬 수 있다는 자부심과 고마움으로, 저는 지금 제 생의 마지막 열정을 현장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현충원에서 부모님을 다시 뵙습니다

아버님, 지지난해에는 홀로 남으셨던 어머니도 당신 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구순을 넘겨 장수하셨으니, 아마 하늘나라에서는 당신이 미리 가 계신 몫까지 합쳐 어머니께 "자식들 잘 키웠구려" 하며 따뜻한 손 한번 잡아주셨으리라 믿습니다.

동네 어귀 선산에 계시던 아버님을 이곳 대전국립현충원으로 모셔온 것은,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당신의 희생과 삶을 국가가 귀하게 모셔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옆에는 참전 동료들이, 근처에는 젊은 천안함 용사들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신을 쏙 빼닮았던 다섯째 동생도 먼저 당신 곁으로 갔으니, 그 녀석과도 못다 한 술 한잔 나누고 계시는지요.

아버님, 용서하십시오. 당신이 정성껏 마련하셨던 조부모님의 유택을 관리하지 못해 수목장을 해드려야 했던 장손의 무능함을, 어머니께 예쁜 2층 집을 지어드리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 못난 아들을 부디 너그럽게 안아주십시오.

아마 이글이 당신에게 올리는 마지막 인사일 겁니다.

아버님, 저 또한 당신의 곁으로 갈 날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생전에는 서로의 불같은 성격 탓에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 이제는 가슴으로 듣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형제들 우애를 지켜보겠습니다. 경제력이 없어 숨죽여 지내야 할지라도, 당신의 아들이라는 자부심만은 놓지 않겠습니다. 비록 만신창이가 된 이력서이지만, 저는 아직 뛸 수 있을 때까지 뛸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이 보여주신 '삶에 대한 책임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님, 이제 그만 화를 푸십시오. 당신의 장남이 당신만큼이나 외로웠다는 것을, 그래서 더 당신이 그리웠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팔봉산 끝자락 소나무 숲보다 더 푸른 이곳 현충원에서, 어머니와 함께 부디 평안히 잠드십시오.

2025년 12월 27일

당신을 그리워하는 장남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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