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을 나오는 날, 딸아이의 엄마를 대신해 하늘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의식불명 상태로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숨만 쉬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제가 묻고 싶었던 건,
그 아이의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곁을 24시간 지켜야만 하는,
엄마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이 늙은 에미의 고통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엄마이기에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며 살아냅니다.
하지만 이건 하루이틀, 한두 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제 에미는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더 살아내야 하느냐고.
딸아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땐
하루 두 차례, 고작 30분씩 면회만 허락됐습니다.
그러다 일반병실로 옮긴 뒤부터,
에미의 삶은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의식이 없는 아이는 그저 숨만 쉽니다.
하지만 엄마는
하루 온종일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간호사들이 돕는다지만,
결국 대부분의 일은 에미가 감당해야 합니다.
한 사람으론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가며 붙어 있어도
쉴 틈조차 없습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두 시간마다 몸을 뒤집어줘야 하고,
가래와 침을 수시로 흡인해야 하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호스로 죽을 넘겨야 합니다.
‘엄마니까 당연하다’는 말이
이토록 가혹할 줄 몰랐습니다.
쪽잠으로 이어가는 반복된 일상.
그 고단함을, 그 외로움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 한 시간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푹 자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바람조차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병원 규정상 일정 기간이 지나면
우리는 이 상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병구완을 이어가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진 건
딸아이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삶,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고통 속에서
엄마는 이미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애 아빠는
늘 잘릴까 불안해하는
가늘게 숨을 이어가는 나이 든 가장일 뿐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가 스러져 갑니다.
이제는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습니다.
혼이 나간 채
그저 숨만 쉽니다.
하느님,
저희 딸의 병구완은
35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저희를 놓아주십시오.
딸아이를 편히
쉬게 해 주십시오.
예전에는
‘내가 먼저 가면 안 된다’며
딸아이보다 하루 늦게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기도조차
의미를 잃었습니다.
딸아이가 정신이 있을 때
가끔 웃으며 말하곤 했습니다.
“엄마가 먼저 가.”
그 말이,
이제는 예언처럼 들립니다.
엄마가 먼저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고통에서,
이 무너진 삶에서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 응급실을 나와야 하는 날이 다가오던 어느 날에,
딸아이의 엄마는 하늘을 향해,
가슴속으로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 왜 살리셨습니까.
제 딸을, 그리고 이 늙은 에미를
왜 이 지옥 속에 붙들어두셨습니까.”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그날 엄마의 눈물은
분명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하~답답한 날 하늘을 향해
딸아이의 에미를 대신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