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사장님께

by Pelex

저는 다그치거나 화를 내시면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말을 잇지 못합니다.

아마 이 회사에서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갈 곳이 없거나,
임기응변에 능하고,
영혼 없는 사람뿐일 것입니다.

이 현장에서 소장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절대적인 오너 앞에서
소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사과장 역할밖에 없습니다.

현장소장이 아홉 번이나 바뀌었다 들었습니다.
직원들은 제가 얼마나 버티나 내기를 걸었다 합니다.
1등인가, 2등인가…
(재직 기간 100일이 최고라는데, 다행히 저는 2등이라더군요.)

공사과장 역할만큼은
누구보다 잘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솔직히 어느 누가 와도
사장님 마음에 드는 소장은 없었을 겁니다.
오너의 말은 무조건 옳고, 절대적이며, 법이니까요.

이 현장에서 업체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사장님뿐입니다.
직원들을 다그쳐 봐야
그들은 떠날 기회만 엿볼 뿐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현장은 사장님이 직접 지켜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 현장을 끝까지 지켜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사장님 성격에 맞춰
계속 머무를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걸 잘 알면서도
끝까지 함께하려 했던 건
저의 얄팍한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존심마저도 지쳐갑니다.
한두 달 더 있다 한들 무엇을 하겠습니까?

사람이 곧 자산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하지 않습니까.
회사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현장소장 ○○○ 배상

(이 글은 지난해 전하지 못하고 혼자 써둔 글입니다.
결국 저는 그만두었고, 3개월 뒤 직원 세 명도 퇴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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