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 빨간 손톱

첫 방학

by 박노을

첫 방학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나는 초등교사로 2022년도 9월 1일 자로 첫 발령을 받아,

비중 있는 업무도, 담임도 맡지 않은 채로

4개월을 오롯이 시골 생활을 적응하는 데에 썼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첫 방학이라는 것이 다가와 있었다.



방학을 목전에 두고 돌이켜보니,

나에게 2022년은

평화로움 속 권태의 순간이 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없이 꿈을 향해 달려오다가

모든 것을 이루고

목표가 없는 상황에 당도하니

그저 길을 잃고 강가에 머무르는 돛단배가 되어 버렸다.






권태(倦怠)



권태롭다는 것은 참 무서웠다.

삶에 의욕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책 [마흔에 읽는 니체]의 내용을 빌려 말하자면,

니체는 욕망이 가라앉아 끝도 목적도 싫증도 욕구도 없는 마치 호수의 물결 같은 휴식 시간이 찾아온다면

이러한 짧은 즐거움 뒤에 찾아온 권태는 얼어붙은 삶의 의지를 녹일 봄바람이라고 말한다.


권태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며,

권태기는 위기가 아닌 전환기라고.

자기 삶의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동력을 얻을 때라고 말이다.



첫 방학을 맞이한 나는,

니체의 그런 말에 증명이라도 하듯,

정말 '나의 삶'을 위해 살았다.


내가 불안해하는 모든 요소들이 여전히 존재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삶.


이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 편안한 것 가릴 것 없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해 보기로 했다.

나 자신을 믿고, 도전하는 삶.

그로 인해 많은 배움을 얻었다.


1) 면허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시점, 두려웠지만 운전해서 간 외곽카페

2) 이상하게 어려웠던 책 읽기가 습관이 된 날들

3) 운동의 즐거움을 더욱 깨닫고, 하루 빼고 운동량을 다 채운 날들

4) 30차시 학급경영 연수 수강

5) 학급 경영 프로그램 세부 구상

6) 건강한 식단

위처럼 나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말 함부로, 과감하게

하고 싶은 것들에 도전하는 한 달을 보냈다.

(3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때의 기록을 서술하는 것이다 보니,

이 당시에는 이것이 대단한 도전이었구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 결과,

얻은 뜻밖의 깨달음이 있다.




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


나는

“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이

많이 다른 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 ‘혼자서 에너지를 충전할 때’ 편안하다.


또,

나는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을 먹을 때 편안하다.


나는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열심히 운동할 때 느끼는 뿌듯함’에 편안하다.


나는 ‘말로 내 생각을 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말로 실수하지 않았을 때’ 편안하다.


나는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을 때’ 편안하다.


나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계획을 세워 불안감을 감소’시킬 때 편안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상황과 해결법에 집중’했을 때 편안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이

비슷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의 차이가 큰 사람이라는 것을

그 해 1월 동안 크게 깨달았다.



이 두 가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

굉장히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나의 23살까지의

인생 몇몇 부분들이

당황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편안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끝없이 나를 그것에 맞추려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계속해서 실수하게 되고

나답지 않아 지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내려두고,

정말로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니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긴 한데,

나는 사실 저것을 하는 것이 더 편안해.’


‘사실 나는 편안한 것이 따로 있는데,

그동안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애써서 조금 힘들었어.’


‘내가 편안하니까 불안하지 않고, 그래서 더 행복해.’


‘편안하니까 나다워서 좋고, 자연스러워.’


‘나다운 거, 생각보다 좋은 것 같아.’


.

.

.


물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그간의 나는

둘 중에 하나에 치우친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힘들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편안한 것”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삶.

그 삶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다.





빨간 손톱

발령 이후 넉 달을 쉬지 않고 젤네일을 했던 지라,

젤네일을 제거하고 한 달 정도 쉬어가면서

내 얇아진 손톱은 자신의 하얀 부분을 모두 잘라냈다.


그래서 잔뜩 짧고 뭉툭해진 내 손톱.

매일 손톱을 길게 길러

젤네일을 해서 몰랐는데,

나는 짧은 손톱이 매우 편안했고,

더 이상 부러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어 만족스러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짧은 손톱 위에

빨간색 네일이 하고 싶어졌다.


사실, 항상 하고 싶었는데

학기 중에는 하기 쉽지 않은 색이라 하지 못했고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아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고 나니, 정말 만족했다.


짧아서 편안하고,

내가 좋아하는 빨간색 손톱이라 행복함을 느낀다.



앞으로의 내 삶도

이 빨간 손톱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편안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균형 있게 해 나가는 삶.



방학의 끝자락에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된 강렬함만큼이나 빨간,

손톱으로 쓰는 깨달음.


이상 첫 방학의 기록을 마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