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다드에너지 김부기 대표와의 대화를 통해 본 전력망의 미래
오늘 오랜만에 세계경제포럼(WEF)의 글로벌 혁신 기업으로 함께하고 있는 스탠다드에너지(Standard Energy)의 김부기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차세대 전력 인프라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ESS(Energy Storage System)에 대해 김 대표가 전해준 통찰이 인상 깊어, 기억이 생생할 때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기존의 리튬이온 배터리가 장악하고 있는 ESS 시장에서, 바나듐이라는 전에 없던 방식으로 독보적인 기술을 개발 중인 이 스타트업은, 단지 새로운 저장장치를 넘어, 전력망의 판을 다시 짜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주제는 바로 ESS가 이제 '그리드(Grid)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많은 이들이 ESS를 단순히 전기를 저장해두는 커다란 배터리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재생에너지가 급증하는 시대에 ESS의 역할은 훨씬 더 복잡하고 중요해졌다. ESS는 이제 마치 심장박동을 안정시키는 ‘박동기’처럼, 전력망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 대표의 말처럼, 지금까지 ESS는 전력망의 흐름을 ‘따라가는(Grid Following)’ 존재였다면, 앞으로는 스스로 흐름을 ‘만들어주는(Grid Forming)’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기존 발전소는 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일정한 주파수(예: 한국은 60Hz)를 유지해 전력망의 기준 리듬을 만들어줬다. ESS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태양광·풍력처럼 간헐적인 재생에너지원은 그 기준 리듬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관성(inertia)’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통 발전소는 무겁게 회전하는 터빈 덕분에 갑작스러운 충격에도 리듬이 쉽게 깨지지 않는다. 반면, 인버터 기반의 재생에너지는 물리적인 완충장치가 없어 작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린다.
최근 불과 5초 만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200만 가구 이상에 전력 공급이 끊긴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남부 발전소의 고장이었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상태에서 관성 부족으로 주파수가 급격히 무너지자, 전체 전력망이 순식간에 붕괴됐다. 이처럼, 재생에너지가 주가 된 전력망은 충격을 완충할 장치 없이는 매우 취약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따라가는’ ESS가 아닌 ‘만드는’ ESS다. Grid Forming ESS는 전력망의 기준 리듬을 능동적으로 생성하고, 주파수가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줄 수 있다. 스탠다드에너지가 개발 중인 바나듐 기반 ESS는 이런 역할을 위해 설계됐다. 바나듐은 긴 수명과 안정성 덕분에, Grid Forming 기능이 요구하는 지속적이고 정밀한 운용에 유리하다.
기존 발전소는 무거운 회전목마처럼 한번 돌기 시작하면 쉽게 멈추지 않는다. 반면 재생에너지는 바람이 멈추면 회전도 멈춘다. Grid Forming ESS는 디지털 방식으로 회전목마를 돌리는 장치다. 물리적 관성 없이도 리듬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다.
앞으로의 전력망은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중심 구조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하지만 이 에너지들은 날씨나 외부 충격에 따라 출렁이는 불안정한 흐름을 가지고 있어, 전력망의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큰 과제가 되고 있다. 이제 에너지를 그저 저장하는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는 전력망의 기준(주파수)을 스스로 만들어주는, '리더 역할'의 ESS가 필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