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니까 색조 화장 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제는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다. 나는 아이들이 집에 오기 전 짧게나마 자유를 누리고 싶었는데 핸들은 벌써 아파트 입구로 꺾어졌다. 일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깨우고 챙기고 버럭거리다가 널브러진 거실을 못 본 척하고 후다닥 출근했었다. 먼저 들어가는 자가 또 그 모든 어지러움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집에 빨리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몸은 벌써 엘리베이터 안이었고, 무의식의 습관대로 나는 결국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결국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움직인다. 블라인드와 커튼을 걷고 창을 열고 아이들이 벗어 놓은 허물을 빨래통에 담고 거실에 펼쳐놓은 남편의 이부자리를 정리해서 장에 넣고 테이블 위에 정신없이 널려있는 책들을 정리한 후 청소기를 밀었다. 거실만 치우고 앉아서 쉬거나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 했는데 나는 아이들 방으로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청소를 마쳤다. 무의식은 그동안 반복적으로 해왔던 일들을 다 해내게 했다.
어제는 동료 선생님들의 코로나 2차 접종 일정이 겹쳐서 수업이 교체된 덕분에 연속 5시간 수업을 해야 했다. 전면 등교를 앞둔 마지막 원격수업 주간이기도 했고 방학과 2주간의 타 학년 원격수업을 거쳤기에 근 6주 만에 노트북 앞에 덩그러니 앉아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일반 교실 수업이 그냥 커피라면 실시간 원격수업은 T.O.P였다. 학급별로 수업을 진행하는 단원이 달랐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중국의 원과 명, 청나라를 오가며 수업을 했다. 아이들이 앉아서 마주하는 작은 모니터를 통해서 어떻게 하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집중하면서 들을 수 있을지 연결된 TV 화면으로 그들을 모니터링하는데 그들은 하나 둘 몰래 카메라를 끄고 있었다. 어떻게 수업을 듣는지 이해는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아우성이 교실을 채웠다. 댓글로 겨우 답을 전하는 아이들과 45분 중에 40분은 혼자 떠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제는 마의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지치기 아주 충분한 날이었다.
그런데 청소기를 다 돌린 나는 자연스럽게 다시 밥솥 앞에 가서 버튼을 눌러 밥의 소재 여부를 확인했다. 밥통이 없어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설거지하고 엎어둔 것을 찾아 쌀을 씻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처음에는 쌀을 박박 씻으며 스피커로 통화했는데 어느 순간 싱크대 수전을 끄고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두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계약이 만료되어서 어제부터 실직자가 되었다고 했다. 실업급여 받으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할 거라는데 그동안 제대로 자신을 위한 몸 관리를 안 해서 그랬는지 목디스크에 문제가 생겨 대형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기로 했다는 안부를 전했다. 친구들 단체톡방에 시중금리보다 높게 특별 판매하는 예적금 상품을 알려줘서 퇴원하면 신청하려고 했는데 내일이 마감이라 다음에 좋은 정보를 다시 알려달라고도 했다. 주변에 천정부지로 오른 지인들의 아파트 값과 주식 투자 안부, 아이들 교육 문제까지 폰은 뜨거워졌고 끝도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통화한 지 30분쯤 지나니 아이들이 왔고 저희들이 알아 집에 있는 간식 챙겨 먹으며 만화 보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면서 또 한 30분을 더 이야기했다. 요즘 사는 이야기, 그간 잘 들을 수 없는 친구의 머릿속 생각들이 전해졌다.
전화를 끊고 마저 쌀을 씻어 밥을 안쳤다. 아이들을 테이블로 불러 모아 오늘의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다. 방학이 끝날 무렵 사주었던 아이들의 문제집을 하루 분량씩 풀어가기로 한지 2주 4일 차였다. 앞부분은 그래도 쉬워서 그랬는지 아이들도 나도 괜찮았는데 어제는 머리에서 김이 계속 올라왔고 결국 몇 번은 뚜껑이 열릴 뻔했다. 7살 작은 아이가 하는 건 1 더하기와 1 빼기였다. 그 연습을 2주째 하고 있는데 계속 엉뚱한 숫자를 적고 있으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간신히 버티고 있다가 오자 마자 쏟아냈다.
“오빠. 나 밥할 힘이 없어… 지금 살짝 미칠 것 같아.”
“왜 무슨 일 있나?”
“아니... 학교에서 수업 5시간 하는 것보다 애들 공부 봐주는 30분이 더 힘들어. 내일부턴 오빠가 도와줘. 나는 도저히 못하겠어.”
“알았다. 내일 저녁에는 내가 할게.”
남편이 오랜만에 차려준 저녁 밥상이었다. 아까 밥 안치면서 냉동실에 얼려둔 육개장 해동해서 냄비에 끓여뒀는데 남편은 그것을 다시 데워 국그릇에 담았고, 프라이팬 옆에 꺼내 둔 돼지갈비를 구워서 접시에 담았다. 김치랑 김, 몇 가지 밑반찬 해서 그것으로 족했는데 계란 후라이를 1인당 하나씩 추가해 주었다. 역시 남편의 직감대로 계란후라이가 제일 인기가 많았다. 아무튼 얼큰한 육개장에 갓 한 쌀밥을 먹다 보니 8시에 시작하는 요가 수업에 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밥 먹고 다 같이 해안도로를 걷자고 하니 조금 있다가 월드컵 예선전 봐야한다는 남편만 빼고 다들 좋아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바깥에 나갔는데 5분도 채 안되어서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3단 우산은 하나 사람은 넷. 결국 남편과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나는 우산을 쓰고 1만 걸음을 채우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산이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불자 나도 걸어온 길을 돌아 그들에게 뛰어갈까 싶었는데 아직 5348보였다. 무의식적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걷고 걷다가 의식이 깨어났다. 오늘 올리브영에 올영 세일 시작되는데 남편 화장품이나 사야겠다. 목표 지점이 꽤나 멀지만 걷기엔 무리 없는 충분한 거리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바구니 하나는 팔에 걸고 돌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다시 무의식에 빠졌다.
‘오빠에게 올인원 제품 이게 딱이구나. 가을 되고 건조해질 테니까 바디 제품도 향 좋은 걸로 담아야지. 애들은 이게 더 좋은데…’
‘쿠션이 다 되어가니까 세일할 때 하나 더 쟁여놔야지… 눈썹 펜슬도 다 되어 가고… ‘
‘가을에 좋아하는 발색의 립스틱 그거 다 되어서 내 입술에 안 맞는 색깔 바르고 있었는데… 가을엔 색조도 바르고 싶다.’
‘화장 제대로 안 한 지 근 2년이 넘었구나. 새도우도 세트로 되어 있으니까 이거 편하겠다.’
‘색조 화장하면 클렌징도 더 꼼꼼하게 해야 되는데…’
걸어가는데 30분도 안 걸렸는데 30분이 넘게 매장을 뱅글뱅글 돌았다. 계산대 앞에서 서서 몇 개 고르지 않았구나 싶었는데 12만 4천 원이라고 했다.
“이거 세일된 거 맞죠?”
“네, 고객님. CJ ONE 포인트 적립 도와드렸고요. 쇼핑백 100원도 함께 결재되었습니다. 예쁘게 쓰세요.”
그랬다. 무의식의 발걸음이 결국 무의식에 잠재된 메이크업에 관한 욕구를 일깨웠다. 오늘 아침의 목표는 새로 산 화장품들로 예쁘게 화장하고 출근하는 거였는데 글을 쓰다 보니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해졌다. 새도우도 바르고 펄감 있는 것으로 포인트도 주고 아이라인도 또렷하게 긋고 마스카라로 눈매를 강조하고 싶었는데 아마 눈썹만 그리고 나갈 것 같다. 내겐 의식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오늘은 퇴고를 거치지 않고 서둘러 글을 발행하고 조금이라도 꿈꾸던 메이크업에 가까운 완성형 얼굴로 출근해야겠다. 설레는 금요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