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와 자신감, 그거면 충분해. 로맨틱하면 더 좋고
나는 감성적이다. 한편 이성적이다.
비 오는 날의 빗소리와 잔잔한 설렘도 좋아하고, 햇살 가득한 날의 윤슬과 푸른 바람 향기도 사랑한다.
아무 날이 아닌 날에 스스로 꽃을 사기도 하고 그냥 밥을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남편에게 우리의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배우자는 또 쓸데없는 소리라고 치부하지만 나는 늘 일상 속에서 로맨스를 꿈꾼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연애를 하는 것 처럼 낭만적이면 얼마나 좋을까?"
"내 아이가 로맨틱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낳은 이 사내아이가 내 배우자보다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황당할 수도 있는 그런 생각을 갖고 아이를 키웠다. (키워가고 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그러고보면 꽤나 진지하고 어른 같은 대화를 나눈 것도 같다. 처음에는 여느 엄마들처럼 때에 맞는 학습지를 하고 때에 맞는 학원을 보내야 하나 고민을 했고 그렇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와 교감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아이가 나를 참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을 본다.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목표를 세우고 실행하듯 아이와 마음 급하게 책을 읽어나가던 날들도 있었다. 목표를 달성하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의 시간들을 겪으며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를 가고, 매일 돌봄 교실에서 많은 시간을 견디는데 내가 이 아이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의 목표가 있다면 그건 무엇으로 해야할까 고민을 해보았다.
내가 힘들때 힘드냐고 물어봐줄 수 있고
기쁜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그렇게 내가 원하던 이상형의 센스와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상형이 그렇다고 하여 선택한 배우자가 그러리란 법은 없다.)
사실 우리 아이는
아직 글을 읽고 쓰는 것도
수를 더하고 빼는 데에도
하고 싶은 게임을 멈추고
만화 영화나 좋아하는 유튜브 시청을 참는 데에도
여러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예상에 없는 돌발 멘트나 행동으로 한 번씩 이 아이에게서 힘을 얻는 순간들이 있었다. 지나고 나면 또 기억 속에서 흐릿해질까 아이에게 감동한 순간을 기록해본다.
1. 감동의 도시락
코로나의 위기가 퍼져나가던 봄방학의 시간, 부장교사를 중심으로 비상회의가 있어 오후 출근해야 하는 날이었다. 데리고 있던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집 전화가 없는 집에서 큰 아이와 매일 함께 있었던 (다행히도 휴대폰이 있음)친구 1명과 여동생 이렇게 셋이 나를 기다리며 몇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집을 나오기 전에 아이들 먹을 점심 도시락을 싸두고 나왔는데 자기들이 다 먹고 집에 돌아온 나를 위해 새로운 도시락을 싸 놓았었다.서랍 안에 있던 다른 도시락 통에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 두 세가지를 담고 밥솥을 열어 밥도 조금 담아두었는데 구워뒀던 소세지 2~3개를 남겨서 넣어두었다가 자기들이 하나씩 주워먹어 도시락 통이 엉망이었지만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도시락 주인은 아빠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2. 엄마에게 꽃다발 건네기
방학을 하는 날이면 한 학기의 피로가 쏟아지는 것 같아 기쁘면서도 참 피곤했다. 복직하고 나서는 방학하는 날에는 이따금 내게 셀프로 꽃다발을 사서 스스로를 격려했다. 돈은 내가 냈지만 꽃을 고르는 것은 아들이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꽃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작은 금액이지만 엄마가 꽃을 좋아하니 자기 돈으로 엄마 방학하는 날 꽃다발을 사주고 싶어했다. 주기적으로 주는 용돈이 없으니 어른들께 받은 용돈과 잔돈이 생기면 아이들 저금통에 넣어주곤 했던 동전들을 모으고 챙겨 만원 남짓의 작고도 예쁜 꽃을 선물해주기 시작했다. 난 이럴 때 여섯 일곱살 아들로부터 로맨틱을 느꼈다.
3. 엄마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남편이 예고 없이 좌대 낚시를 간 오후 청소를 하다가 순간 또 화가 나려던 참이었다. 멍하니 드라마를 보면서 쇼파에 앉아 아니 기대어 누워있는데 아침에 내려둔 식은 커피에 얼음을 넣어 “엄마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이거 아이스야. 시원하니까 기분 풀고 쉬어.” 라고 말해줬다. 덤으로 눈치껏 청소도 해준 어느 주말이 생각난다.
4. 관리아저씨 고맙습니다.
코로나 초기 자체 격리 생활때의 일이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 아이들에게 바나나를 잘라 주었더니 알록달록한 과자랑 같이 해서 예쁜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접시를 들고 와 마카롱도 다쿠아즈도 울고 갈 신메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먹다보니 알록달록 과자가 양이 엄청 많다고 우리 아파트를 지켜주는 관리 아저씨께 나누어주고 싶다고 했다. 지원이가 갑자기 편지를 쓰고 싶다고 내용을 부르고 다인이가 연필로 쓰고 같이 그림을 그려 색칠을 하고 봉투에 담아 관리사무소로 내려갔다. 뜬금없는 과자 선물과 홍삼을 받으신 관리사무소 식구들은 고맙다하시며 아이들이게 한웅큼 사탕을 쥐어보내주셨다.
5. 어쩌다 설거지
힘든 엄마를 도와주고 싶어 큰 아이가 네 다섯살일 때부터였나보다. 그냥 설거지가 재밌어 보였던건지 식탁 의자를 밟고 올라가 비누 거품을 내어 그릇을 문지르고 물로 헹구는 일을 몇 번이고 했다. 귀여워서 잘했다고 칭찬을 했지만 아마도 내가 다시 설거지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가끔씩 나의 설거지를 도와주고는 했던 아이가 초여름 나의 미라클모닝과 함께 아침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식사 후 음식물쓰레기를 통에 비우고 빈 그릇을 싱크대에 넣는 일을 당연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사촌 형아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아침 운동을 마치고 아이들 밥을 차려놓고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식탁이며 싱크대가 아주 깨끗했다. 놀라웠다.
6. 첫 방학식, "선생님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코로나로 아이는 주2회 월, 수에만 담임선생님을 만난다. 1학년 첫 입학식도 제대로 못한 아이가 4월이 넘어서야 선생님을 처음 만나고 일주일에 두 번 만나니 어떤 느낌일까 그저 낯설고 어색했겠다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런 아이가 13명 남짓 절반의 학급 친구들과 8월 첫 주 수요일에 여름 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종례를 할 때 우리 아이가 번쩍 손을 들고 선생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 방학하면 선생님을 못 보는데 선생님이 보고 싶으면 어떡해요?”
나도 지금껏 수 십번의 방학을 했는데 이렇게 스윗한 멘트로 방학을 맞아한 적이 있었던가?
7. 할머니에게 맛있는 밥을 사줄꺼예요.
아이가 매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돌봄교실도 방학 중에 한 이틀 방학을 한다. 돌봄의 공백이 생기는 시간, 도움을 청할 곳은 외할머니뿐이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와서 자기 밥을 챙겨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줄 것이라 기대하니 기다리는 하루 하루가 즐거웠나보다. 할머니가 오면 더운데 요리하기 힘드니까 하루는 내가 용돈을 모아서 맛있는 밥을 사줘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방학을 기다린 한 달여의 시간동안 아이가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저렇게 어른들께 받은 용돈과 할머니 밥 사줄 기특한 생각을 하기에 착한 일 할 때마다 우리가 500원, 1000원 챙겨준 돈이 모여 6만원이 되었다. (동생이 받은 1만원도 자신도 할머니랑 같이 밥을 먹는다는 조건부 기부되었음) 담임선생님께서 1학기 마지막 대면 수업일에 비공식적으로 방학선언을 하신 날 두 할머니들께 전화를 걸어 다가오는 토요일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이모까지 4자 회동을 하자고 했다. 할머니들께서 먹고 싶은 걸 사드리겠지만 돈은 6만원 뿐이니 엄마아빠는 빼고 우리가 토요일 점심에 다같이 만나서 사이 좋게 같이 먹어야한다고 했다. 친할머니는 그냥 호기롭게 장난으로 하는 말인줄 아시고 말이라도 고맙다며 사랑한다고 하고 끊으셨다. 외할머니는 짜장면은 조금이라며 메뉴를 더 고심해서 정하겠다고 하셨다.
토요일 아침, 할머니들께 전화를 걸어 점심을 먹자고 연락을 하니 모두들 마음은 고맙지만 비가 많이 와서, 약속이 급히 생겨서 아무튼 제각각의 이유로 점심 선약을 취소하셨다. 꼬깃꼬깃 지폐와 동전들을 가득 담은 면가방 속 6만원을 만지작 걸리며 한참을 서운해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늘이 맑았고 멀리에 사는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포항이모와 사촌형아 동생이 통영에 내려왔다.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거야.” 어린왕자 속 대사처럼 5시에 도착하는 형아를 세네시간을 기다리는데도 아이가 흥얼거렸다. 그리고 형아가 먹고 싶다는 회를 사러 회센타에 갔다. 외할머니, 큰이모, 형아가 모두 좋아하는 활어회를 아이가 그 면가방 속 지폐를 꺼내어 3만원치 샀다.
“오늘은 제가 할머니 밥 사줄 돈 모은 걸로 회를 샀으니까 맛있게 드세요. 내가 쏜다!”
쌈채소와 하늘보리를 함께 샀더니 아이 수중에 2만 9천원이 남았나보다. 다시 그 돈을 새로 준 누비 지갑에 접어 넣고 한 몇일 간 떠날 채비를 한 베낭가방에 넣었다. 내일이면 한 일주일가량 태어나 가장 오랜 시간 엄마 없이 타지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날들이 펼쳐질 것이다. 아이가 걱정도 되고 언니에게 미안도 하지만 사려가 깊고 보통 이상의 다정한 말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재주가 있으니 이번 첫 자유여행이 즐겁고 행복하길 바란다.
아이가 요리 하기를 좋아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레시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은 더 좋아한다. 맛있다는 칭찬은 더 더 좋아한다. 아이가 멋진 쉐프가 되어도 좋겠고 훗날 자기 아이가 먹고 싶어하는 어떤 메뉴든 척척 만들어주는 근사한 아빠가 되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