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의 낙서
도시 내에서 찾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놀이터다. 널찍한 공간과 쾌적함,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책도 가득하고 인터넷 이용도 무료다. 무엇인가 배우려는 젊고 순수한 좋은 기운도 가득하니 이런 명당 터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가까이 있는 도서관이 바로 ‘꽃자리’다.
그래서 그런지 뒷산 아래 자리 잡은 시립도서관에서는 누구나 열중 자체다. 고뇌(?)에 찬 낙서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5학년, 머리가 아프다.” “원래 방학이 시시한 건가.” 등등. 그중에는 더 심오한(?) 낙서도 찾았다. “최대 공약수, 최소 공배수, 우리가 왜 배워야 하나?” 공약수와 공배수가 계산도 어렵고 이해도 어려워서 그런가 보다.
나이테가 많아서 다 까먹어서 그런가, 이것을 배워서 어디에 써먹었던가? 세상 웬만한 경험을 다 했을 이순(耳順)을 넘겼건만 공약수와 공배수를 별로 써먹은 기억이 없다. 인터넷을 뒤적거려 봐도 그럴듯한 해답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생각할수록 답이 먹먹하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배워야 될 이유가 반듯이 있을 텐데 말이다. 하긴 계산법도 다시 공부해야 할 정도니,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배워야 했던 이유’ 말고 용처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질문’과 ‘의문’이 현대문명을 탄생시켰고 인류는 제대로 된 질문에 대해서는 결국 답을 얻었다. 그러니 이 학생도 호기심이라는 긍정에서 질문이 출발하였다면 언젠가는 답을 얻을 것이다. 고뇌에 찬 어린 초등학생의 이런 의문이 차곡차곡 쌓이면, 틀림없이 ‘질문을 통하여 남을 깨우치고 자신도 깨달음을 얻은 소크라테스’의 후예가 되겠지.
그런데 혹시 ‘공약수와 공배수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부정적 마음에서 출발하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을까? 부정적인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좋은 시험 점수를 얻기 위해’ 또는 ‘무조건 배워야 하는 하나의 공식‘으로 간주해 버린다면, 흥미를 잃어버린 주관이 없는 또 한 명의 ’ 적자생존(제대로 받아 적어야 살아남는다)‘ 형 어린이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지 모르겠다.
사실 대학교 졸업할 때쯤 어떤 시험 준비를 위해 과목 별로 시중에 나온 교재를 몽땅 정리하고 통째로 외우다시피 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 많은 방정식과 이론이 어디에 어떻게 써 먹히는지도 알지 못한 체, 거의 대부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아카데미와 사회의 확연한 괴리였다.
‘공약수와 공배수’는 작은 일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 유발’이냐 ‘흥미 상실’이냐의 관점에서 보면 ‘비범(非凡)’과 ‘평범(平凡)’을 가름하는 시작 점 일지도 모르겠다. 한마디의 격려와 질책이 인간의 운명을 바꾼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니 그렇다. 브라질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미국에 거대한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기상과학 이론인 ‘나비효과’가 인간 심리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을는지.
어제의 새로움이 내일은 구닥다리로 변화는 시대다. 새로움을 찾아내는 ‘안목’과 실용적인 ‘사고’가 시대를 바꾸고 있다. 어쩌면 발명이 세상을 이끈 ‘에디슨의 시대’는 점차 지나고, 인터넷을 통해 수십억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각종 정보와 아이디어를 융합하여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발견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발견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흥미’와 ‘호기심’이 아닐까?
이제 어린 학생들의 공부도 관행을 탈피하는 새로운 방향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그럼 이런 공부는 어떤가? 누구누구 줄넘기 잘하나. 누구누구 응급처치 잘하나.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는 컴퓨터가 곱셈과 나눗셈을 왜 그렇게 빨리 계산할 수 있는지, 방정식도 모르는 컴퓨터가 방정식의 답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는지, 게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어린이들에게 좀 신나는 공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