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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A Oct 11. 2022

어디까지 '대기 (Waiting)'해봤니

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6화)

자폐스펙트럼 장애(ASD)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부모가 맨 처음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이른바 '대기'라는 산. 웨이팅(Waiting)은 소문난 맛집 앞에서나 번호표를 뽑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몸짓인 줄만 알았다. '발달지연에 대한 고민의 깊이 = 대기하는 시간'일만큼, 이 세계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온갖 대기가 내 앞에 쫘라라 등장한다는 사실. 아이의 자폐 징후 앞에서 완벽한 치료는 아직까지 없을진대, 그나마 어느 정도의 '좋아짐' 혹은 '나아짐'을 보장받기 위해 부모는 뭐라도 해보고 싶다. 그렇게 차츰차츰 대기의 늪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좋은 의사를 만나기 위해 내 아이의 이름을 여기저기 대기자 명단에 올려두는 거다.


좋아짐 혹은 나아짐을 보장받기 위해
부모는 뭐라도 해보고 싶다


일단 발달센터에 ABA치료 (Applied Behavior Analysis, 응용 행동 분석의 약자로 자폐아동의 조기 중재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음) 대기를 걸고, 그와 함께 언어치료와 감각통합치료 대기를 건다. 유명하다는 대학병원 소아정신과 교수님 앞에 초진 대기를 걸고,  또한 무한정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동네 소문난 재활의학과 병원 연계 센터에서 먼저 언치 (언어치료) 감통 치료 (감각통합치료) 받아보고자  대기를 건다. 언제쯤 우리 아이 이름을 불러주려나, 순서가 드디어 돌아왔다고 전화를 주려나, 답답한 심정이 턱끝까지 차올라 한숨만 힘없이 터지지만 방법이 없다. 자폐 징후를 보이는 아기를 위해 맨 처음   있는 일은 일단 '대기'.


탑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대기 걸기. ASD 가정이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바로 ‘대기’라는 산.


2026년 11월 25일 수요일
4년이나 기다리라니


이 글을 쓰는 날로부터 무려 4년 2개월이나 남은 이 날은? 바로 내 아들이 Y 대학병원 소아정신과 C 교수님을 뵐 수 있는 가장 빠른 날. 4년 뒤에나 가능한 외래라니! 그나마도 어떤 사람의 예약이 취소된 덕분에 겨우 생겨난 자리였다. 국내 자폐와 관련해 진료를 보시기로 유명한 교수님들의 이름을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는데, 이미 대가 중 한 분 K교수님은 아예 향후 5년까지 진료예약 '불가'라고 했다. 언제까지 기다려도 좋으니 예약이 어떻게 안 되겠냐고 재차 질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NO. 그나마 어찌어찌 C교수님과의 초진 일정이라도 잡아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S 병원과 A 병원의 예약도 혹시 몰라 잡아뒀지만 그 또한 내년이다. 수년에 달하는 소아정신과 진료 대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기에 일단은 다른 진료과, 다른 의료진들의 도움을 받기로 방향을 틀어본다. 골든타임을 놓칠 수는 없는 거니까, 부지런히 이쪽저쪽의 문을 두드린다. 소아정신과 이전에 재활의학과의 문을 두드리고 자폐가 아닌 언어지연 (Speech Delay)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치료를 진행해보기로 본다.


골든 타임을 놓칠 수 없어
부지런히 이쪽저쪽의 문을 두드린다


재활의학과에서도 대기-대기-대기는 마찬가지. 4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소아정신과 초진보다는 나았으나 그래도 한 달 남짓 기다려 만나 뵈어야 했던 소아재활과의 교수님. 그리고 교수님과의 초진 이후 언어평가와 발달검사를 위해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평가와 검사 뒤 교수님의 처방에 따라 언어치료를 '기다려야' 했다. 평균적으로 6개월 정도는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야 한단다. 발달 지연에 따라 언어치료를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치료사 수는 부족하고 앞서 치료를 진행하던 아이의 수업이 종결되야나 그다음 대기를 건 아이의 치료가 시작될 수 있는 상황. 글을 쓰는 현재 자그마치 3개월을 기다렸고 남은 3개월 정도를 기다리고 있다. 내년이 시작될 무렵이면 우리 아이 치료 자리가 나긴 날까.


정부지원 발달 바우처도 '대기'는 마찬가지. 아이의 언어평가와 발달검사 결과지를 받아 의료진의 소견서와 함께 제출하면 나라에서 발달 바우처라는 게 나온단다. 대학병원 초진과 재진 이후 부지런히 서류를 제출했는데 이 또한 6개월 정도는 기다려야 한단다. 아이의 발달과 관련한 지원과 등록은 어딜 가나 6개월이 표준인 듯싶었다. 우리 애 36개월 전에는 보란 듯이 말이 짠 트였으면 좋겠는데 '지원'한번 받고 '치료'한번 제대로 받으려면 일단 '기다려야'한다. 기다림은 미덕으로 통하는 순간도 있지만 자폐 진단과 치료의 문제와 얽히니 그저 잔혹한 인내로 느껴질 수밖에.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언젠가는 내 순서가 오겠지, 기다리는 마음.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될텐데 초조한 마음 또한 매일매일 뒤범벅 되어.


운 좋게 집 근처 ABA연구소에 개별치료 자리가 났다. 치료는 시작했지만 겨우 얻어낸 저녁식사 직전 틈새 시간대이다 보니 아이는 배고파했고 피곤해했다. 발달센터에도 인기 시간대라는 게 있는 법. 대부분 아이들이 하교하거나 어린이집 하원한 뒤에 이어지는 이른 오후 시간대가 초절정 골든타임. 어떤 센터에서는 아예 그 시간대 대기조차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오후 시간대는 형아들 (취학연령)한테 인기가 많으므로 나이가 어린 영유아일수록 오전 시간대에만 배당하겠다는 센터의 입장도 어렴풋이 이해는 갔다. 대기자 이름이라도 올려주는 곳은 그나마 고마운 곳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바닥 진짜 대기의 연속이잖아!"라는 생각만 뭉게뭉게.


기다린 보람 있네
와, 여기 진짜 최고다!


맛집에서 끝끝내 내 자리를 할당받고 원하던 음식을 단숨에 먹어버리고 났을 때 우리는 생각한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다리도 아프고 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지겨웠지만 그래도 기다려서 먹을 만큼 최고로 맛있었다고 말이다. 자폐스펙트럼의 세계에서도 '기다린 보람'이라는 게 손톱만큼이라도 존재했으면 좋겠다. 유명 교수님과의 첫 만남이 '기다린 보람' 있었으면 좋겠고, 우수한 치료진으로 구성된 발달센터의 치료도 '대기 걸어둔 보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애의 징후와 상태를 누구보다 정성 들여 섬세하게 살펴주고 앞으로 갈 길을 마음 다해 조언해줄 수 있는 귀인을 만날 수만 있다면야 그 또한 못 기다릴까.


6개월은 기다리셔야 해요
가장 빠른 예약일이 4년 후예요


마음이 조급하든 애가 타든, 일단 대기를 걸면 시간은 흐르고야 만다. 6개월이든 4년이든, 어찌어찌 살다 보면 달력은 넘어갈 것이고 내 아이의 차례가 오겠지. 그나마 조금 일찍 조기중재를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시작했으니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이의 골든타임을 크게 놓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독다독 셀프 위안을 삼아 본다. 오늘도 '기다림' 안에서 토닥토닥. 아이의 치료나 진단을 위한 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다리다가 지쳐서는 안 될 일.


이왕 기다리는 것, 아이를 위해 기분 좋게 '기다림'을 즐겨보기로 한다. 원하는 센터에서의 치료나 희망하는 교수님과의 초진 디데이까지 두근두근 설레 보기로 한다. 엄마표 치료라도 차근차근 쌓아가면서, 내 아이와 한 순간이라도 밝게 눈 맞춤하면서. 그 언젠가 남편과의 첫 만남 이후 문자의 답장을 기다렸던 마음으로, 출퇴근 직장인 가득 찬 카페 안에서 가지런히 앉아 내 커스텀 커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내 커리어의 첫 출발선에서 내 이름 석자 콕콕 박힌 합격자 명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늘도 그렇게 대기를 하기로 한다. 대기와 대기로 점철된 ASD 세상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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