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8화)
아나운서로 살아갈 때의 일이다. 지역 방송사에서 근무하다 보니 뉴스 앵커부터 예능 교양 행사 mc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하루 종일 소화해야 할 때가 있었다. 진부한 표현이련만 몸이 두어 개 더 있다면 좋겠다고 실감했던 때가 부지기수. 자칭 타칭 “이건 아이돌 스케줄”이라고 뾰로통한 불만을 분출했다. 분 단위로 스케줄을 정리해야 그나마 짬짬이 시간이 나서 커피 한잔 뽑아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워라밸이고 뭐고 진짜 ‘방송 일’만 열심히 달렸던 시절. 몸은 피곤하면서도 또 아이러니하게 마음은 뿌듯하고 알차서 말도 안 되게 바쁜 일상이 제법 싫지만은 않았다. 이랬던 연예인 스케줄, 조금 다른 맥락에서 아들이 겪어야 할 운명이 찾아왔다. 소위 ‘자스’ 징후를 느끼고 나서 조기 중재에 나서려다 보니 빼곡한 치료 일정을 잡는 것부터가 1순위 숙제였다.
언어치료 주 2회, 행동치료 주 2회, 감각통합치료 주 1회, 여기에 여유가 되면 놀이치료와 인지치료까지 격주 주말마다 틈틈이.
와아 두 돌 넘어 갓 세돌 남짓한 아이들의 수업 스케줄이라고 생각한다면 ‘바쁨’의 밀도가 엄청나지 않은가! 이렇게 아이의 수업 스케줄을 짠 첫째 또래의 엄마를 발견할 때면 일단 박수부터 보내게 된다. 언어+행동+감통까지 수업을 구성하려면 일단 괜찮다는 센터 상담부터 가야 하고 (상담도 4-5만 원가량의 상담비를 내야 하는 곳이 대부분), 우리 애 하루 일과에 적당한 스케줄 자리가 나있는지 무수히 많은 전화를 돌려야 한다. (전화를 돌리다 보면 콜센터 직원이라도 된 듯 상담에 능숙해진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덤!) 다른 수업들과 시간 충돌하지 않게 테트리스 하듯 스케줄을 짜두고 여기에 진짜 우리 애가 스트레스받지 않을지 가상 시뮬레이션 돌려보고 결국엔 치료 스케줄을 확정한다. 뭐 이게 끝일 리 없지. 짜인 스케줄 따라 아이를 픽 드롭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오고)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역 배우 매니저 능가하는 열성을 보여야 하는 게 바로 ‘자스’ 엄마의 운명이랄까.
빼곡하게 수업 스케줄을 짜두는
또래 엄마를 발견하면
일단 박수부터 보내게 된다
“어머니 일단 남는 수업 잔여석 시간부터 알려드릴게요.” 집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의 발달센터에 대기를 걸어둔 결과, 드디어 한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언어치료 수업은 수요일 6시 30분, 감각통합치료 수업은 금요일 5시 30분… 아이의 발달을 촉진하기 위한 각양각색의 수업들, 요일마다 시간대마저 다르다 보니 다이어리에 바로바로 받아 적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십상. 혹여 하나라도 놓칠 세라 토익 리스닝 문제 풀 때의 집중력을 발휘해 아이의 수업 스케줄을 받아쓰기 한다. 수업 가능한 센터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기 마련인데 자리가 남아있기라도 한 게 어디냐 싶어, 이 자리 놓칠세라 조바심부터 난다. 발달 바우처에 대한 수요는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엄마들은 내 아이 치료하나 더 받게 하려고 ‘센터 찾아 삼만리’라니, 입시 전략 짜주는 ‘쓰앵’님이 있듯 자스계에도 수업 플래닝 해주는 ‘쓰앵’님 계시면 참 주목받겠다 싶다.
치료 수업에도 ‘부익부 빈익빈’
다양한 치료를 맘껏 누리는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복 받았다’
한편, 떠오르는 생각은 치료 수업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있겠다는 것. 어떤 아동들은 엄마들의 열성에 힘입어 연예인 스케줄과도 같은 빼곡한 치료 일정을 따라가지만 아예 수업 하나 접하지 못하는 아동들도 분명히 있을 테다. 치료에 대한 정보 자체가 부족해서 일 수도 있고 앞 회차에서 말했던 대로 치료 수업 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에 필요성을 알더라도 치료 자체에 엄두를 못 낼 수도 있다. ‘조기 중재’라는 말답게 두 돌도 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알찬 스케줄 아래 치료받으면 뭐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자폐 극뽁은 마치 스케줄이 얼마나 알차게 짜여있는지에 따라 좌우될 것만 같다. 우리 아이보다 더 빽빽한 치료 일정을 손에 쥔 집들이 부러웠던 이유다. 고작 주 2회 1시간씩 행동치료를 받는 아이보다는 주 1회라도 언어치료, 감각통합치료를 더 추가한 아이의 친구들이 발달상 괜스레 더. 빨리 좋아질 것만 같았으니까. 비용에 대한 억압 없이, 일찍이 대기 걸어 센터의 다양한 치료를 맘껏 누리는 아이들은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복 받았다’. 자스 치료라는 달리기를 하고 있는 거라면 이미 그런 아이들은 최대한 숨차지 않게 편안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거다.
아이의 치료 스케줄 앞에서 다시 한번 다이어리를 편다. 간간이 내 하루의 감상을 적고 방송일정을 정리해 나가던 다이어리가 어느새 아이의 치료 스케줄 기록장으로 바뀌었다. 치료 과목별로 색색이 형광펜을 입혀 색칠하는 과정이 마치 학창 시절 국어, 영어, 수학 과목별 공부 일과를 정리하던 모습과 닮았다. 비용을 들이기에도, 아이 둘 키우는 엄마로서 시간을 짜내기에도 만만치 않은 것 투성이지만 그래도 각 날짜마다 아이의 치료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흔적이 보이면 그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상. 틈나는 대로 아이의 일상에 무슨 치료든지 끼워 넣어야 그나마 아이의 자스 성향에 대한 ‘불안’과 ‘걱정’ 도수가 내려가는 것 같다. 이런 노력이 꼭 비례하지만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두 돌에서 세 돌 사이, 영유아기 요맘때가 아이의 징후를 개선하고 발달과업을 이뤄가는 데 황금기라지. 그렇다고들 하니 또래 엄마들처럼 비슷하게나마 달려보기로 한다. 좌악, 일단. 요일별로 줄을 긋는다. 연예인 스케줄 비슷하게라도 최선을 다해 시간표를 그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