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1화)
종종 이상스럽게 뇌리에 꽂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예지몽을 딱히 꾼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계시와 같은 초현실적 일을 겪은 것도 아닌데 왠지 그 느낌이란 게 쏴하게 스칠 때가 있다. 어떤 중요한 시험을 치를 때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것만 같다는 걱정 찌든 상상. 어떤 연애의 결말이 결국엔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예감.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그런 '우려' 섞인 느낌들이 자주 찾아들곤 했다. "요즘 감기 대 유행이라는데 우리 애도 왠지 심하게 앓이 한번 하면 어쩌지." 류의 생각들.
'자폐'라는 단어 앞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다. 분명 나와 지금 당장 연결고리가 없는 단어인데 '혹시나'라는 단어와 엇물려 늘 머리를 무겁게 압박하곤 했던 두 글자. 부모로서의 근심과 무기력을 체감하기에 그보다 더한 어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종종 드라마나 영화 속, 자폐에 관한 장면들을 봤던 경험치가 문뜩 떠오르기도 했고 그 속의 주인공들이 우리 아들이 걷게 될 모습과 조금이라도 겹치게 되는 건 아닐까. 근거 없는 상상들을 이리저리 하게 될 때가 있었다. "아니지, 내가 왜 갑자기 이런 걱정들을 하는 거야"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이내 고개를 흔들곤 하면서.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이따금씩 찾아오는 기분 나쁜 생각 릴레이 중 하나였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결코 그럴 리 없을 거지만.
우리 애가 혹시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아이가 조금 다르다고 느낀 건 첫돌이 서너 달 지난 이후였다. 동그란 물체를 돌리기 좋아하는 아이의 습관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소꿉놀이의 접시를 돌렸고 가지고 놀던 딸랑이도 가차 없이 돌렸다. "재밌으니까 저러겠지", "아기들은 원래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하잖아" 잠깐 생긴 습관,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견고한 '덕후 기질' 정도라고 치부해두고 싶었다. 내가 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꽂혀서 같은 카페만 도돌이표로 찾아가듯이, 우리 아기도 그런 거겠지. 하나에 꽂히면 그것밖에 모르는 순정파 성향이겠지. 자폐의 일부 징후 일 수 있는 '상동 행동'은 아닐 거라 믿고 싶었던 거다. 하나의 행동을 의미 없이 반복한다는 그 상동 행동, 우리 애는 아닐 거라고 단어를 저편에 미뤄두고 싶었다.
자폐. 공식 명칭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영어로는 Autism Spectrum Disorder. ASD가 됐든 자폐가 됐든, 그 말을 스펙트럼이라고 길게 늘여부르든 그냥 자폐라고 콕 집어 간결히 낙인찍든, 내 인생 내 남편의 인생, 내 아들의 인생 그 누구의 삶 한 켠에 깃들지 않았으면 했던 단어. 아이가 한쪽 손으로 한쪽 귀를 팔랑팔랑 건들 때도, 창문 밖 나뭇가지의 가녀린 흔들림과 빛의 조합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을 때도, 그 단어는 우리의 것이 아니길 막연히 바랐던 순간들.
"우리 애가 좀 느려서요"
자폐, 그 무거운 두 글자가 아들의 삶에 끝끝내 함께 하게 될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작성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아들은 28개월. 그 어떤 진단을 내리기에 아직은 다행히도 어린 나이다. 결국에 따라붙을 운명의 단어를 잠시 장맛비 지나길 기다리듯 피해있는 것일까. 잠깐의 도피라고 해도 아직은 그 어떤 것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데 희망을 걸어보는 날들이다. '자폐'라는 단어도 잠깐의 걱정에 불과했던 거라고 영영 밀어낼 수 있는 그날이 올 거라고 상상해본다는 것.
우리 애가 이런 건, 그 무거운 두 글자 때문이 아니라 '조금 느려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날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의미 있는 문장을 말하지 못하고 포인팅과 호명 반응이 또래들에 비해 약할 지라도 아직은 그럴 수 있는 날들이다. "우리 애가 좀 느려서요, 아직 뭐 그럴 수 있죠" 또박또박 힘주어 말할 수 있는 날들. 자폐. 두 글자가 드리우는 그림자 아래서 나와 내 남편, 우리 아이는 앞으로 어떤 모양새로 자리하게 될까. 걱정하다 지우고, 불안해하다 이내 몸서리치며 도리질하는 날들이 돌고 또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