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3화)
“엄마 해봐 엄마, 엄마?”
이 세상 엄마 아빠 열이면 아홉은 같은 문장을 하루에 수십 번씩 말할 거다. 아이가 슬슬 옹알이를 할 무렵, 6개월 남짓이 되면 엄마나 아빠라는 말을 비슷하게나마 하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 얻어걸려도 좋으니 한 번만 해봐! 간절함을 담아서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엄마는 엄마대로 ‘엄마’라는 말을 오늘은 기필 코야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열렬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아빠는 아빠대로 ‘빠빠’라도 좋으니 비슷한 발음을 내뿜기를 바라본다. 아이마다 시기는 천차만별이겠으나 말은 그렇게 차근차근 시동이 걸려 시작되는 듯하다.
10년을 넘게 아나운서라는 명찰을 달고 살았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심지어 통사론 형태론 사회언어학에 집중하며 국어학에 꽂혀 살았던 20대 초반의 날들), 아나운서로도 수년을 살아냈으니 아이의 언어 교육쯤은 문제없겠다(?)는 오해를 살 만도 했다. “엄마가 아나운서니까 아이 발음도 좋겠네” 류의 시선도 때때로 받았다.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더라도 어찌 됐든 말로 먹고사는 직업세계에 오래 자리했으니 아이와 말로, 또 글로 소통하는 것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동화책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안정된 톤으로 정확한 발음으로 읽어줘야지, 그렇게 오래오래 시간을 보내야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내내 자연스레 품어왔던 일련의 계획이었다. 나는 아나운서 출신 엄마니까.
엄마가 아나운서니까
언어교육 걱정 없겠네
아이 발음도 좋겠네
나이가 들수록 확실히 느끼는 건데 모든 계획은 부질없다. 아이가 소위 “말이 터지지 않아서” 초조한 날들이 시작됐다. 내 아이와 남을 비교 따윈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이 옆집 누구, 친구나 후배 누구의 아들 딸을 간간이 떠올리며 불안한 마음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내 친구 딸 누구는 엄마가 묻는 말에 ‘문장형으로 대답’을 하던데, 내 후배 아들 누구는 엄마한테 하트를 날리며 ‘사랑해’라고 속삭이던데… 정작 나의 아들은 ‘단어형’으로, 몇 단어만 반복적으로 웅얼거리를 좋아했다. 아이마다 개인차가 있는 게 당연하거늘, 아이가 개월 수를 더해갈수록 뒤쳐짐의 각도가 더 벌어지는 것만 같아서 불편한 걸 어찌하리.
자동차를 매우 강력하게 좋아했던 아이는 ‘자동차’를 아기형 언어로 귀엽게 바꿔 자주 외치고 다녔다. “빠붐빠. 빠붐… 빠!” 타요도 좋아하고 로보카 폴리도 좋아하는데 일단 모든 자동차는 아이에게 ‘빠붐빠’로 통했다. 아이의 치료 선생님은 어떤 말이라도 자발적으로 발화한 부분이 있다면 강화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상식적으로도 그러하다. 의미가 있는 문장단위의 말이든, 이해가 영 안 가는 짧은 단어든, 말했다는 행위 자체에 희열을 느껴야 말하는 데 재미가 붙고 자꾸자꾸 할 테니까. 자동차가 출몰할 때마다 ‘빠붐빠’라고 구별해 외칠 수 있는 능력만으로도 기특했다.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야”
핑계 댈 수 있는 시국인 게 오히려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마스크를 쓰는 일상이 3년째 이어지고 있는 일상이었다. 뉴스에서는 이 탓에 영유아기 많은 아이들이 언어발달에 ‘지연’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다고들 보도했다. '우리 애만 그런 게 아니었네.' 옆집 애도,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도, 건너 건너 아는 랜선 조카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거락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육아의 세계에서 흔히 등장하는 심리 중 하나였다. 우리 애만 이런 거 아니라고. 다들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특별히 초조해할 필요도 없고 아무튼 괜찮다고.
빠붐빠, 빠붐, 빠붐빠붐
택띠, 불다동따
자동차는 '빠붐빠'로, 버스는 '빠붐'으로 통했다. 택시는 ㅅ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것치곤 꽤나 명확하게 '택띠'였고, 소방차, 그러니까 소위 아이의 언어로 불자동차는 '불다동따'로 통했다. 발음이 뭉개져도 좋고, 우리집 안에서만 통하는 특수언어여도 좋으니 감각 정보를 받아들여 명명할 줄 아는 이른바 택트(tact)를 하기만 해도 기특했다. 빠붐빠만 반복하는 아이는 좋아하는 자동차와 연관된 모든 단어를 하나 둘 익혀가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영역 밖으로 벗어나 다양한 카테고리에 입이 닿기를 원했으나 수개월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빠붐빠'와 그의 친구들.
이쯤 하면 테슬라 취직해도 되겠어.
'자동차' 어휘로 첫 단어가 트였고 일어날 때도 잘 때도 '빠붐빠'를 찾으니 (심지어는 자다가 잠꼬대로도!) 자동차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그 누가 이보다 강할쏘냐! 지난 화에서 던진 우스갯소리를 다시금 되뇔 때도 되었다. 빙글빙글 돌리는 걸 좋아하고 본인이 도는 행동을 좋아하니 팽이 경시대회에 나가면 잘하겠다고, 피겨스케이팅 선수하면 1등 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빠붐빠에 대한 열렬한 애정 점수만 놓고 본다면 테슬라 입사시험에서 최고점 찍을 우리 애였다. "그래, 이쯤 하면 테슬라 취직해도 되겠어." 씁쓸한 농담은 늘 자폐의 무게감을 사뿐 덜어내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해준다. 자폐의 흔한 증상 중 하나, 반향어의 늪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경쾌한 농담이라고 해두자.
코끼리도, 사자도, 호랑이도 명쾌하게 외칠 수 있는 그날이 오긴 올까. 빠붐빠가 아니라 냉장고, 컴퓨터, 책상까지도 그 예쁜 입으로 조물조물 발음해 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참 좋겠다. 서점의 유아서적 코너에서 '탈 것 친구들' 주변만 맴맴 도는 엄마가 더 이상은 아닌 날이 오기만 한다면! 그나마 할 수 있는 단어라도 자주 말하게 해주고 싶어서 '타요'나 '로보카폴리' 캐릭터 책만 뒤적거리고 있는 내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는 날들.
언제까지 빠붐빠만 할 거야!
...라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순간, 저쪽 거실에서 날 보며 해맑게 소리 치는 아이 "빠. 붐. 빠" 세 음절에 있는 힘껏 맑은 목소리를 담아 외치는 청량한 음색을 어찌 혼낼 수 있을까. 그 청량감이 쌓이다 보면 언어 지연에 대한 고민과 불안도 점점 그 농도를 희석될 수 있을까. 빠붐빠의 늪에서 어제도 오늘도 '자폐'에 대한 걱정을 힘껏 끌어안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