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계획할 수 없다는 고통

재판이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

by 경계인

사람이 어려운 일을 겪게 되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말이 눈에 잘 들어오고 감정이입도 쉽게 됩니다. 예전같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같은 말들을 유심히 보게 되고 그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처지에 나를 대입시켜 그 사람이 한 말과 글을 뜻을 곱씹으면서 격하게 공감하곤 합니다. 형사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은, 물론 다른 재판 역시 중요하겠지만, 인신의 자유가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할 수도 있는 명예 그리고 상당히 많은 경우 직장 생활 내지는 밥벌이네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그 영향의 정도도 커지기 때문에 심리적, 정신적 타격감도 상당합니다. 재판이 아주 많이, 수년 넘게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뭐 하나 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긴 호흡에서 멀게 내다보고 해야 할 일들에 손을 대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얼마전 법률신문에 실린 박유하 교수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 달린 부제가 '내 삶을 계획할 수 없다는 고통'입니다. 이 인터뷰는 어떤 시인이 했는데 역시 시인이라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박유하 교수 본인의 표현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형사재판이 길어져 미래를 내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를 '내 삶을 계획할 수 없다는 고통'이라는 표현으로 잘 압축했습니다. 저는 박유하 교수의 책을 본 적도 없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는지 모르기도 하고 학술적인 문제를 법정에 끌고 간 것이 맞는 것인지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2019년부터 감사와 수사, 재판을 받고 있고 이 절차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고 이 재판으로 인해 불확실성의 지대로 들어오게 되었기에 박유하 교수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나중에 밝힐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징계 절차를 거쳐 해임에 이르는 과정에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경우의 수를 줄이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은 계속 중인데 기약도 없이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징계절차나 인사상 변수가 너무 많아 각각 경우의 수를 헤아리다 보면 어떤 계획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공무원 인사제도는 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가끔 했을 정도입니다. 저는 어찌되었든 징계로 해임되었지만 다른 부처에서 정치적 성격이 강한 사건에 휘말린 경우 정부가 바뀔 때까지 5년을 허송세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판이나 수사같은 절차가 길어지면 그 자체가 처벌 성격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학에서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같은 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재판이 길어지는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건이 복잡해서, 너무 민감해서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뒤에는 당연히 그 결정을 한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건 검사일 수도 있고 판사일 수도 있고 위원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Not in my terms of office'로 손쉬운 결정을 내리는 그저 사무처리에 불과하겠지만 그 결정의 끝에 매달린 삶은 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보이지만 안 본 걸로 하거나, 조직의 결정이라는 미명 하에 넘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은 삶을 계획하기 보다는 멀지 않은 미래만 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인지,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무엇인지, 밥은 어떻게 먹고 살지, 나중에 좋은 결과가 재판에서 나온다는 전제 하에 지금 어디에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좋을지 같은 조건부 계획들이 늘 머릿속을 채우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또 자연스럽게 내 친구, 동료들의 삶과 경로와 비교하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내 삶을 온전히 계획할 수는 없지만 좌충우돌 흥미진진한 드라마나 게임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게임입니다. 중간에 갑자기 끝판왕이 나올 수도 있고 갑자기 좋은 아이템을 얻어 능력 최고로 올라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귀인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신이 저를 꼭 필요한 위치로 데려다 놓을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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