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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디 Jun 27. 2020

엄마는 왜 김밥 꽁다리만 먹었을까?

나는 김밥을 참 좋아한다. 일주일 내내 한 가지 음식만 먹어야 한다면 단연 김밥을 택할 것이다. 참치김밥, 치즈김밥, 소고기김밥  등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다면 한 달까지도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남이 싸주는 김밥일 때만 가능하다. 내 손으로 직접 매일 싸 먹어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01. 나의 첫 김밥 도전기


얼마 전 처음으로 김밥을 싸 봤다.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이제야 뒤늦게 시도해본 이유는 딱 봐도 재료 준비가 어려워 보여서다. 모든 요리는 조리 과정이 어려운 게 아니라 재료 손질이 가장 고달프다. 요즘에는 모든 재료가 손질되어 있는 키트 형태로 팔기도 한다. 정말 '말고 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고 싶지 않은 마음 80과 얄팍한 자존심 20으로 일일이 재료를 손질하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 우엉조림은 완성된 걸 구입했다.)


오이는 전날 저녁에 채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물기를 쫙 빼서 냉장고 넣어뒀다. 괜히 무첨가 된 제품을 사느라 단무지와 햄은 통으로 된 걸 샀다. 또 요즘 유행하는 예쁜 김밥들은 모든 재료를 얇게 썰어서 넣는 게 포인트더라. 그래서 단무지, 햄, 당근, 계란까지 얇게 써는 작업이 추가됐다.


처음 하는 요리더라도 조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레시피를 한 번에 외우고, 먼저 해야 할 것들을 머리로 그려보고 시작하는 편이다. 그렇게 내 예상시간은 1시간 30분이 나왔다. 남편이 집에 도착하는 7시 30분까지 완벽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남편이 도착했을 때, 나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어? 벌써 왔어?..."라는 당황스러운 한 마디를 뱉고 말았다. 내 칼질이 매우 서투르다 걸 감안하지 못했다. 참고로, 칼질 경력 2년인데 한 번도 피를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너무 조심스럽게 천천히 썰기 때문이다.





허둥지둥 준비한 재료를 식탁 한쪽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김밥 하나를 마는데 이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구나'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래서 어릴 적 엄마가 김밥을 싸는 날이면 부엌 바닥에 잔뜩 차려놓고 하셨는지 이제야 알았다.


또 김밥을 썰 때 칼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칼날에 참기름을 발랐는데도 칼날이 좋지 않으니 한 번에 척척 썰리지 않고 한참 시간이 걸렸다. 열 줄 가량 연달아 썰던 엄마의 손목은 얼마나 시큰거렸을까, 그 옆에서 빨리 먹고 싶다고 보채던 어린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해졌다.




02. 김밥 꽁다리에 대한 고찰


엄마는 김밥을 썰 때면 옆에서 꼭 꽁다리만 먹으라고 했다. 꽁다리도 맛있긴 하지만 나는 예쁜 모양의 완성된 걸 먹고 싶어서 엄마 말을 안 듣고 중간에 썰어진 것을 쏙 빼먹었다.


김밥을 썰 때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에게 똑같이 꽁다리를 먹으라고 했다. 남편은 어릴 적 나처럼 중간에 놓인 김밥에 손을 댔다. 나도 모르게 “안 돼! 그건 예쁘게 말아진 거란 말이야!”하며 약간의 짜증을 냈다.



다양한 시도들 (햄김밥, 진미채김밥, 계란김밥, 제육김밥)



김밥을 썰며 꽁다리를 먼저 먹어버리는 이유 두 가지를 알았다. 하나는 김밥을 싸다 보면 장시간 준비 끝에 허기져서 먹는 것이고, 둘째는 플레이팅 상 또는 도시락을 쌀 때 꽁다리는 상대적으로 덜 예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러한 이유로 꽁다리를 계속 먹다가 김밥을 다 썰고 나니 이미 배가 불러있었다.


썰면서 꽁다리를 잔뜩 먹어서 그런지 내 김밥이 맛있는지 잘 몰랐다. 다행히 남편은 맛있다며 먹었지만 나는 이미 장시간의 준비로 지쳐서 몇 개 못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가서 점심 도시락으로 어제 싸 둔 김밥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생각해보면 엄마도 김밥을 싸준 날이면 정작 본인은 제대로 안 드셨던 것 같다. 가족들에게 줄 김밥과 도시락용을 담아내고 나면 이제 나머지 뒤처리를 하느라 바쁠 뿐, 엄마와 함께 식탁에 앉아 김밥을 먹은 기억이 없다.






다음에는 김밥을 싸서 친정집에 들려야겠다. 20년 넘게 엄마가 싸준 정성에 비하면 나의 김밥 한 줄은 별 것 아니겠지만 재료 하나하나에 엄마의 사랑이 담겼음을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꼭 보답해드리고 싶다.


이렇게 김밥 하나를 싸며 나는 온갖 감정을 느꼈다. 생각보다 예쁘게 말아지는 모습에 희열을 느끼고, 재료 준비만 하다가 아직 김밥은 말지도 못했는데 바닥난 체력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식들 소풍 가는 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혼자서 열 줄이 넘는 김밥을 부지런히 쌌을 엄마의 모습이 생각 나 슬픔을 느꼈다.


그 모든 걸 깨끗이 잊게 해주는 최고의 감정.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모든 설움이 사라지고 행복했다.


김밥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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