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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수수 Sep 18. 2020

패딩조끼를 입고 산책하는 여름밤

57개월 아들

 아이가 등원을 하면 성당에 가서 "우리 아이를 지켜주세요." 기도하던 날들이 있었다. 수용 언어, 표현 언어, 착석, 사회성, 소근육, 자조능력, 감각추구... 기도를 하고 오면 매일 나를 옭아매는 그것들로부터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떠드는 아이는 그동안 못다 한 말을 하려는 기세다. 몇 년 전 여행 이야기까지 꺼내 좋았다고, 친구가 어떻게 행동해서 슬펐다고, 아빠가 자신을 위해 장난감을 만들어주었다고, 주절주절 하루 종일 늘어놓는 말들에 "쉿" 조용히 하자고 당부도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아이에게 조용히 하자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핑퐁 대화가 조금씩 이어지고, 아이가 뱉어내는 말의 길이가 길어졌다. 그러자 사춘기인가 싶은 아이의 반항이 시작되었다.


 양치 안 하고 싶어, 어린이집에 안 가고 외갓집에 가고 싶어, 비행기 타고 대만 여행 가고 싶어! 비행기에 코로나 없어, 미운 엄마 저리 가! 아빠만 사랑해!, 언어 수업 안 할 거야. 피곤해! 드러누워 울고 떼 피우던 아이가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한다. 자기의 편의대로 가고 싶은 곳은 코로나가 없고, 가기 싫은 곳은 코로나가 있다고 하기도 한다.



 그 날은 옷 사이즈를 보기 위해 지난 계절에 입었던 외투를 입혀봤었다. 작년엔 거부했던 외투가 올해는 멋져 보였던 모양인지 아이는 내 요구에 잘 따라주었다. 몇 벌의 외투를 입었고, 사진을 찍어달라고도 하고, 거울을 보고 씩 웃고 오기도 했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과 도토리(반려견)를 데리고 시누이와 산책을 준비했다. 아이가 외투를 입고 나가겠다고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덥다는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밤의 괴물, 땀띠, 나가지 마! 별별 말을 다 해도 소용없었다. 아이는 서럽게 울었고,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아이는 긴 팔에 한 겨울에 입는 패딩 조끼를 입고 9월의 여름밤을 산책했다. 안 덥냐는 끈질긴 질문에 아이는 꿋꿋하게 "안 더워. 좀 냅둬"라고 답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는 땀으로 온몸이 뜨끈뜨끈 끈적끈적했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통합반 아이들끼리 받는 음악치료 수업을 듣기 위해 도서관에 가는데, 한 살 어린 동생을 불러 손을 잡고 갔다고 전해 들었다. 아이의 행동에 선생님들이 모두 웃었다고. 제 자신도 못 챙기던 게 이제 타인을 챙길 줄도 알게 되었구나, 아이의 알림장을 읽고 눈물이 맺혔다.


 57개월 아이의 반항도 언젠가 지나갈 것을 안다. 57개월 반항이 지나고 60개월 반항이 올 테고, 아이는 그만큼 또 자랄 거다. 이것을 알면서 아이랑 아득바득 싸우는 나도 열심히 크고 있는 아이처럼 조금은 더 좋은 엄마로 자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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