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애자.
성적 욕구에 의해 성적 애욕을 느끼는 사람.
온 세상에 태양은 무서운 듯 숨었고, 달은 나무꼭대기에서부터 온 세상을 덮는 검은 이불이 되어 천천히 퍼져갔어요. 그 어둠은 끈적하고 두꺼운 안개처럼 하늘에 쌓여갔고, 우주의 심장이 깨어나 허공에 거대한 블랙홀을 만드는 듯 조용히 부풀어 올랐답니다. 모든 아이들이 꿈나라로 떠난 밤, 숨어있던 요정들이 슬며시 그들의 집으로 나타났어요. 요정들은 아이들의 행복을 마치 꿀벌이 꿀을 빨듯, 아주 천천히 훔쳐가기 위해서였지요. 폴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폴은 침대에 누워 부모님의 "잠이나 자라"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고 있었어요. 잠이 오지 않았거든요. 뭔가 불길한 기운이 하늘을 감돌았지만, 폴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어둠을 응시했어요. "하늘이 왜 이래?" 폴은 속삭였죠. 검고 깊은 하늘은 마치 온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듯 무서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리고 그 순간, 요정이 폴의 집에 도착했어요. 요정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발끝으로 다가오는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어요.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어둠이 요정의 손길처럼 조심스럽게 폴에게 닿았죠.
아이들아, 들어봐, 우리들이 왔단다,
두려워 말렴, 우린 꿈의 요정들이란다.
어떤 아이는 초콜릿을 마음껏 먹고 싶다 꿈꾸었지,
불쌍한 아이, 불쌍한 아이, 하지만 걱정 말렴,
그 아이의 꿈은 곧 이루어질 테니까.
천천히 돌아가는 칼날이 그 아이를 위해 가동되고,
고깃덩이는 찢기고,
그 비명소리는 달콤한 설탕 속으로 녹아들지.
고깃덩이는 초콜릿 믹스와 함께 끓고,
포장지 속에 감싸여,
마침내 모두가 사랑하는 달콤한 한 조각이 되어,
세상으로 퍼져나갈 거야.
우린 꿈의 요정들이란다,
넌 어떤 꿈을 꾸니?
아이들아, 두려워 말렴.
우리가 온다,
너의 꿈을 들려줘,
두려워 말고,
우리가 들어줄게.
어떤 아이는 슬픈 상황에도 웃을 힘을 꿈꾸었어.
불쌍한 아이, 불쌍한 아이, 하지만 걱정 말렴,
그 아이의 꿈은 곧 이루어질 테니까.
그 아이의 친부모가 모두 불에 타 사라진,
그 고통의 날마저도,
그 웃음소리는 더욱더 크게 사방으로 퍼져나갔지.
엄마도. 아빠도. 모두가 불타며 녹아내리고,
불꽃 안에 휩싸여,
마침내 한 줌의 가루조차 안 되는 잿더미가 되자,
더 크게 웃었을 거야.
우린 꿈의 요정들이란다,
넌 어떤 꿈을 꾸니?
아이들아, 두려워 말렴.
우리가 온다,
너의 꿈을 들려줘,
두려워 말고,
우리가 들어줄게.
요정은 폴을 노려보며 조용히도 노래했어요. 폴은 베개를 끌어안고 속삭였지요. "너희들의 모습과 그 세상을 보고 싶어." 그 말이 끝나자, 요정들이 마치 연기처럼 폴의 앞에 나타났어요. 그들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등에 달린 나방 같은 날개가 부드럽게 흔들렸고, 입가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번졌죠. 요정들은 폴을 향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여기 있단다, 네 꿈속에, 너를 기다렸지." 폴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어요. "너희들의 세계론 언제 갈 수 있니?" 요정들은 귀엽게 웃으며 손짓했어요. 그 순간, 창문 뒤로 은빛 계단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마법의 계단이었죠. "우리 아이야, 어서 나오렴. 밖으로 가야 한단다." 요정들이 손을 내밀며 속삭였어요. 폴은 두려움 없이 창문을 넘었어요. 그곳에는 그가 꿈꾸던 이상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어요. 거리는 낮은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빛났고, 길가에는 예쁜 누나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들은 웃으며 유리창 너머로 폴을 바라보고 있었죠. 간판은 전부 하이힐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거리는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릿하게 섞인 곳처럼 보였고, 그 속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어요. 신문지를 깔고 자고 있는 레드 아저씨. 그는 늘 폴에게 친절했죠. 아빠가 집에 없을 때면, 언제나 레드 아저씨가 엄마와 놀러 오곤 했거든요. 폴은 가끔 레드 아저씨가 왜 그렇게 자주 오는지 궁금했지만, 그저 엄마의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요정들은 다시 속삭였어요. "어서, 더 깊은 곳으로. 우리 세계는 이제 막 시작됐단다." 거리는 꿈속 세상처럼 비현실적이었어요. 어느 예쁜 누나는 토끼옷을 입고 봉 옆에서 춤을 추며, 아저씨들에게 돈을 받고 있었고, 다른 누나는 뚱뚱한 아저씨 품에 안겨 나른하게 춤을 추고 있었어요. 폴은 이 모든 광경이 마치 꿈결 같다고 생각했죠.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모른다고. 폴은 요정들에게 물었어요. "여기가 너희의 세계니?" 요정들은 그 질문에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어요. "아니, 아가야. 아직 멀었단다. 여긴 너희 세상이야." 그때, 한 요정이 폴에게 작은 종이백을 건넸어요. 그 안에는 분홍색 알약 하나가 들어 있었어요. 요정은 속삭였어요. "이건 요정의 눈물이야, 폴. 우리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거란다. 어서, 그걸 삼키렴." 폴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요정의 눈물을 입에 넣고 삼켰어요. 그러자 즉시 엄청난 쾌락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마치 세상이 모든 색으로 폭발하는 듯한 황홀감에 젖었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조이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고, 폴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폴은 눈을 떴어요. 그리고 그 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죠. 거대한 분홍색 성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어요. 요정들은 그 성을 가리키며 노래했어요. "저건 요정 여왕님의 성이란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한다, 아이야." 폴이 성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마치 꿈처럼 환상적이었어요. 긴 테이블에는 달콤한 초콜릿 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온갖 종류의 사탕들이 반짝이며 폴을 반겼어요. 예쁜 누나들은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고, 그 주위에는 화려한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추고 있었죠. 폴은 성 안쪽을 더 둘러보며 한쪽 구석에서 어른들이 카드게임을 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옆에 이상한 기계들이 줄지어 서 있었어요. 폴의 눈에는 그 기계들이 정말 신기해 보였죠. 기계에 달린 손잡이를 어른들이 힘껏 잡아당기자, 그 안에 여러 가지 그림들이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기계는 윙윙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빛을 뿜었고, 그림들이 멈추면 어른들이 박수를 치거나 얼굴을 찡그렸어요. 폴은 그것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죠. “저건 마치 돌리면 사탕이 나올 것 같은 기계야! 근데, 왜 어른들만 하고 있을까?” 그때, 요정 여왕님이 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어요. 그녀는 놀랍게도 수영복을 입고 있었고, 폴을 기쁘게 맞이하며 부드럽게 말했어요. "오, 나의 아이들이 소년을 이곳으로 데려왔구나. 이제, 손님으로서 이 연회를 마음껏 즐기렴." 여왕님의 목소리는 마치 초콜릿처럼 달콤하게 느껴졌어요. "여봐라, 노래로 내 흥을 돋아라!" 요정 여왕님이 명령하자, 요정들이 일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광경은 폴이 보기에 무척이나 아름다웠답니다.
마셔라, 취해라, 욕망의 파도 속으로,
너의 몸을 던져, 그 육체를 흔들어라.
우리의 살에 너의 살을 포개고,
우리를 취하라, 너의 것으로.
욕망을 억제하지 말고,
여왕님을 위해, 그녀의 은혜를 위해.
소년이여, 인간이여,
우리와 함께, 이곳에서
욕망의 파도 속으로 몸을 던져라.
모두가 하나 되어 춤을 추네,
여왕님의 기쁨을 위해.
욕망의 파도에 몸을 맡겨라,
여왕님의 은혜를 느껴라.
폴이 음료수를 마시며 달콤한 초콜릿을 먹고 있던 순간이었어요. 갑자기 성의 천장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더니, 하늘에서 거대한 공중 전함이 나타났지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거대한 해적선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위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졌어요. "털보 선장이다!" 요정들 중 하나가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외쳤답니다. 전함 위에서는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닻을 내려라! 털보 해적단, 전진하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해적들이 하나둘씩 밧줄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성 안에 있던 요정들은 모두 깜짝 놀라 몸을 숨기려 했지만, 이미 늦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 해적들은 크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소리는 성 안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답니다.
전진하세, 전진하세!
저 요정들을 우리의 노예로 삼을 때까지!
노를 저어라, 힘차게! 으하하하!
불쌍한 요정들이여, 쾌락에 빠져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구나!
전진하세, 전진하세!
우리의 배에 약탈품이 가득 찰 때까지!
털보 해적단, 보물은 훔치고 남자는 모두 죽여라,
여자는 우리의 노예로 삼으리라!
판자 위를 걸어라! 모든 남자는 죽어야 하고,
여자는 노예로 끌려가리라!
우리의 배에 금은보화가 넘쳐날 때까지!
털보 선장님을 위하여!
해적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성 안의 공기는 금방 어두워졌답니다. 폴은 해적들의 소란에 겁에 질려 온몸이 떨렸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살려줘!" 그때, 한 요정이 폴의 옷깃을 단단히 붙잡고 다급하게 속삭였답니다. "아이야, 요정 여왕님을 따라오렴. 여왕님께서 안전한 길로 널 인도하실 거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번쩍이는 해적의 칼이 폴을 향해 날아왔어요. 해적은 고함을 지르며 외쳤지요. "여왕은 니미, 지랄을 하는군! 이 창녀 같은 것들아! 악마 같은 년들!" 요정 여왕님의 시녀들은 상황이 급박해지자 재빨리 요정 여왕님을 피신시키려 했지만, 털보 선장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어요. "우리 사이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빚이 있었죠, 나의 여왕 폐하?" 요정 여왕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담배를 꺼내 들었어요. 불을 붙인 후, 연기를 내뿜으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지요. "그랬던가? 그랬을지도 모르겠군." 털보 선장은 폴을 발견하자 크게 웃으며 외쳤어요. "오호, 인간 노예라니! 이런 걸 몰래 숨겨두고 있었군!" 그 말을 들은 요정 여왕님은 담배를 문 채로 차분히 대답했지요. "걘 아직 세뇌가 덜 됐어. 왜, 저게 그리 필요한가?" 털보 선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어요. "당연하지. 난 전리품이 필요하다고. 저 인간을 포박하라! 저건 이제 우리의 노예다!" 폴은 당황한 나머지 요정 여왕에게 간절하게 청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요!" 하지만 요정 여왕님은 태연하게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냉담하게 대답했지요. "이 정도로 충분한가? 아니면 우리 왕국을 더 부숴야 마음이 풀리겠는가?" 털보 선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어요. "이번엔 이 인간과 초콜릿으로 만족하겠지만, 다음엔 네 그 아름다운 육신을 박제로 만들어 우리 배에 전시할 거다." 여왕님은 무표정하게 대꾸했어요. "... 그러시든지." 폴은 절망에 휩싸여 소리쳤어요. "여왕님!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여왕님! 로즈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정말로 저를 발견해 주셨잖아요! 진짜예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 그러나 그의 외침은 곧 해적들에 의해 막혀버렸어요. 해적들이 폴의 입을 틀어막고 그를 거칠게 철창 안으로 던져 넣었답니다. "어이, 혀를 뽑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털보 선장은 비웃으며 한마디를 던졌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적들은 폴에게 노예의 인장을 새겼지요. 그 뜨거운 쇠가 그의 피부를 태우며 깊이 새겨지자, 폴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어요. 눈물과 침, 콧물과 함께 피눈물과 코피가 흐르며, 그의 몸은 극심한 고통으로 발작했어요. 결국 피가 섞인 눈물 속에서 폴은 정신을 잃고 말았답니다. 폴의 눈이 감기며 마지막으로 보인 저 멀리 요정 여왕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죠. 금발의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푸른 눈은 바다보다 더 깊이 그를 빨아들이는 듯했어요. 새하얀 피부는 분명히 폴에겐 요정 여왕님이 처녀의 순수함을 지닌 것처럼 보였답니다. 그리고...
폴은 눈을 떴다. 자신이 있는 곳은 더 이상 요정들의 성도, 끌려가게 될 해적선의 노예 수용실도 아니었다. 그런 환상 같은 망상 속 세상이 아니었다. 그건 '다소 어이없고 멍청하기까지 한 꿈'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좁디좁은 공간에 몸을 묶인 채 끌려가던 그 감각에서 깨어났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그곳은, 낯선 현실이 아니라 너무나 익숙한 뉴욕, 브루클린의 그의 작은 창고였다. 그가 창고의 잡동사니 사이에서 잤는지 창고는 심하게 어질러져있었고, 주방의 식기들과 화장실 변기도 심하게 더러워져있었다. 어젯밤, 창밖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소리는 어느새 멈춘 듯했다. 거리엔 여전히 노란 택시들이 바삐 오갔고, 그 규칙적인 움직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흐르고 있었다. 폴은 자신의 발밑에 깔린 낡은 러그를 내려다보았고, 벽에 설치된 낡은 커튼을 한번 만져보았다. 폴의 눈에 어제저녁에 마시다 남긴 커피잔과,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무심히 남겨진 흔적들. 그는 그대로 텔레비전을 켰다. 희미한 흑백 화면 속,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흐릿하게 비치는 화면의 그들은 그저 폴의 시야를 지나가는 일종의 흐름일 뿐이었다. 자명종은 출근 시간을 알리며 오전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폴은 무심하게 외투를 걸치고는 거리로 나섰다. 한쪽 벽엔 '뉴욕 대상 영국 런던시 홍보 캠페인'이라는 글자가 적힌 광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잔뜩 움츠린 몸을 옷 속으로 숨긴 채, 폴은 추운 아침 공기 속에서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 담배 연기가 차갑게 뱉어질 때쯤, 그는 익숙한 지하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폴의 집 근처는 브루클린에서도 악명 높은 창녀촌이었다. 어둠이 막 물러가기 시작한 이른 아침, 단속이 없는 틈을 타 바니걸 복장을 한 창녀들이 길거리에서 천박한 춤을 추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거리의 적막 속에서 더욱 도드라졌고, 조명을 받으며 반짝이는 옷자락은 폴의 시야에 자꾸만 걸렸다. 멀리서 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오래전 그를 버리고 떠난 모친의 내연남이었던 노숙자, 레드였다. 그는 여전히 낡은 신문지를 깔고 거리에 누워 있었다.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초라한 모습으로 잠든 레드는 마치 세상의 잊힌 조각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폴은 그를 힐끗 쳐다보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를 파고들었지만, 더 차갑게 다가오는 것은 그 주변 풍경들이었다. 창녀들의 유혹적인 춤과 얄팍한 웃음, 그 모든 것들이 다시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나가는 그를 향해 웃음을 날리며 다가왔고, 폴은 고개를 돌리며 지하철역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폴은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며 무심코 반대편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한 여성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단 3초 남짓,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교차했다. 검은 블라우스에 재킷을 걸친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하고 고요했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자연스럽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불꽃이 타오르며 담배 끝이 붉게 물드는 동안, 폴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떠올랐다.
‘로즈.’
‘저 여성분은 로즈라는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데?’ 폴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건 단지 3초 남짓한 순간의 환상 같은 느낌에 불과했죠.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거든요. 폴은 지하철로 내려가 직장에 제시간에 출근하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어요. 로즈라는 이름은 곧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그의 머릿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