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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감시.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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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준 Sep 22. 2024

3장: 선지자.

남보다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

어둡고 좁은 방. 벽은 불쾌할 정도로 가까웠고, 공기는 마치 오래된 먼지 속에 갇혀 있었다. 작은 탁자 하나가 방 한가운데 놓여있었고, 순결, virginity, 영혼, 목자, purgatory, 성서, 손길, observer, outcast, sexualsapiens, disassociation, duality, schizophrenia, subconscious, 성욕, prophet, repression. "이름은?" 검은 양복에 중절모가 인상적인 감시관은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폴에게 물었다. 그의 눈은 폴의 심연을 꿰뚫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그 눈빛 속에서 폴은 한순간 자신이 투명해진 기분이 들었다. "폴 윌리엄 Jr." 소설의 주인공은 무감하게 대답했다. 소설의 조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위에 그의 이름을 적었다. "음, '폴 윌리엄... 주니어.' 이봐, 폴. 이 종이를 보게. 무슨 감정이 드나?" 폴의 시선이 종이에 내려갔다. 그곳엔 마른 가지들로 이루어진,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치 죽어있는 듯한, 혹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무. "나무군요." 폴은 짧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회의가 섞여 있었다. 과연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나무일까? 아니면 나무의 모양을 한 무언가? 이 비정상적인 침묵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환영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해져 갔다. 감시관, 소설의 조연은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속에는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었다. "나무가 죽어있군요." 폴은 짧게 내뱉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죽은 나무지." 감시관은 폴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침묵 속에서 무겁게 흔들리며, 마치 이미 결론에 도달한 자의 것이었다. 그는 파이프담배를 입에 물고 천천히 한 모금 빨아들였다. 파이프에서 나오는 연기는 공중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갔고, 방 안에 가득 찬 정적에 기묘한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다. "이봐, 폴." 감시관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어젯밤, 자네는 어디에 있었지?" 폴은 고개를 들어, 비웃는 듯한 눈빛을 감시관에게 던졌다. "제 집에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감시관님." 감시관의 파이프에서 더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가 방을 뒤덮으며 형태 없는 구름이 되어 흐트러졌다. 감시관의 얼굴은 그 연기 속에 희미하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자네의 정신 검진 진단서를 보게나, 폴!" 감시관의 목소리는 불쾌할 만큼 평온했다. "자네는 망상장애가 심하군! 자네가 집에 있었다고? 천만에! 자네는 어젯밤 로지 에든버러 양을 스토킹 하지 않았나!" 폴은 다시 한번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무언가 초연한 것과 비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그건 망상이 아니었나 보군요." "하나 충고해 드리자면, " 폴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말투엔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지가 아니라 '로제'였습니다, 존경하는 감시관님. 그나저나, 제 출근이 늦어지고 있는데 저를 언제 보내주시는 건가요? 만약 이 일로 제가 직장을 잃으면, 그 책임을 지실 건가요?" 그의 입가엔 썩소가 스며들었고, 그 미소는 방 안에 흐르는 불안한 침묵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감시관은 갑자기 책상 위의 서류를 움켜쥐어 공중으로 내던졌다. 서류들은 어지럽게 흩날리며 마치 무질서한 생각의 파편처럼 방 안을 떠돌았다. "단단히 미쳤군." 감시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네한테 직장이 있었나? 오, 폴. 자네, 무슨 일을 하지?" 폴은 그 질문에 잠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간단한 사무직이죠." 감시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치 그의 말속에 숨겨진 비밀을 찾으려는 듯 응시했다. "간단한 사무직? 좋아.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나? 도대체 무슨 사무직이지?" 폴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다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의 대답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젖히고, 감시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저한테 그러셔도 얻는 건 없을 겁니다." 그 말은 마치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감시관의 파이프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처럼,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나무는 죽어있었죠, 감시관님." 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으나 그 속에는 무언가 깊숙이 감춰진 비밀이 담겨 있었다. "감시관님은 느끼지 못하시겠죠. 그런 건 때론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요." 감시관은 그 말을 듣고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의 입가엔 경멸이 서려 있었다. "자네는 바보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그런 미친 소리가 자네를 도와줄 거라 생각하나? 그런 헛소리는 아무 의미도 없지." 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전 저 소리가 들립니다. 활자 위에 쓰인 냄새. 보이지 않는 것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몽롱해졌다. "바다의 향기, 여인의 향기, 저녁 식사의 향기, 요정의 모습, 해적의 얼굴들... 이 소설 위에 쓰일 모든 것들이 이젠 느껴지죠. 당신은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알아요. 실체를 깨달았어요." 그의 시선이 다시 감시관에게로 돌아갔다. "당신은 자신이 감시자라고 믿고 있겠지만, 불행히도 진짜 감시자는 따로 있죠. 그들은 저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폴의 말은 마치 밀실 속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감시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고, 방 안의 공기는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감시관은 그를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미친놈." 그러나 그 순간조차도 폴의 얼굴엔 평온함이 흘렀다. 마치 그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된 순서였다는 듯이. 폴은 경찰서 문을 조용히 밀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그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마치 그곳에서 그가 있었던 흔적조차 사라진 듯, 아무런 제재도 없이. 외투만 걸친 채로 차가운 바람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우중충한 회색빛 구름이 마치 다시 비가 내릴 것이라는 듯 위에서 무겁게 얹혀 있었다. 길거리는 침묵 속에서 얼어붙은 듯했다. 폴은 잠시 멈춰 서서, 거리의 텅 빈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더 깊숙이 들어온 것은 무언가 의 깨달음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진실이 그의 가슴속에서 뚜렷해졌다. 그 깨달음은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도망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감시자는 그들이었다. 그들이 언제나 그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감시자라고 믿었던 그 순간조차도, 사실 그는 철저히 감시받고 있던 것이었다. 그들의 눈은 항상 그를 향해 있었고, 그는 그 눈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폴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삶은 이제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추운 날씨와 잿빛 하늘 아래에서, 그 깨달음의 무게가 그를 더욱 짓누를 뿐이었다. 폴은 마치 금기된 선악과를 취한 자처럼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저지른 행위는 불가역적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의 삶 속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 모든 사건들이 그가 이끌어 온 서사였고, 그 누구도 아닌, 오직 그만이 그 서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는 잠시 생각했다. 이 모든 글, 이 모든 행위들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기괴한 이야기로 치부될 뿐일 것이다. '그저 이상하고 기괴한 내용이네.' 누군가는 그렇게 덮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가? 폴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관중들을 향해 인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관중들은 없었다. 식탁에 놓인 의자들 역시 텅 비어 있었고, 그 위에 올려진 것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폴은 그 텅 빈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더욱 크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화려한 정장을 꺼내 입고, 마치 만인의 주목을 받는 인물처럼 나타나 의자들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감시자분들." 그가 허공을 향해 말했다. "저는 폴 윌리엄 주니어고, 이번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어 몹시도 영광입니다." 그가 들은 박수소리는 분명 환청이었을 것이다. 그 공간에 있는 것은 머그잔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러나 그 박수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고, 폴은 마치 그 소리가 현실인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폴은 정말 멍청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가 아닐 가능성은 너무나 명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기어코 자신이 그 주인공임을 증명해 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신이 완전히 나간 채,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모습이 과연 증명의 일부일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폴의 모습은 그저 망상의 연속에 불과했다. 현실은 그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폴은 문득 저 글이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소름이 끼쳤다. "멍청하다니?" 폴은 속으로 분개했다. "이걸 묘사하고 있는 저 자는 그 박수 소리도, 이 진실도 모르는 것인가? 내가 주인공인 걸 왜 모르는 거지?"그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그는 반드시 증명해 낼 것이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한, 그 진실을.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이미 그의 손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 폴의 집 안방 벽에는 오래된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안에는 마치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나무의 그림이 있었다. 이 나무는 언제나 폴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죽어버린 나무의 쓸쓸한 모습은 오히려 그에게 이상한 위안과 영감을 주었고, 그를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다. 마치 그 나무가 생명을 잃음으로써 폴에게 자유를 선물한 것처럼. 폴은 그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자신이 깨달은 진실이 진정으로 진실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서서히 번졌다. 그것은 무언가를 마침내 이해한 자의 미소였다. 그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사랑도, 로즈 양도 아니었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그가 깨달은 진실의 입증이었다. 그것이야말로 폴이 찾아 헤매던 유일한 열쇠였다. 깨달음이 입증될 때, 비로소 그는 완전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폴은 지금 당장 그 해적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 사실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진정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는 그저 또 하나의 망상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폴은 깨닫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깨닫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깊은 망상에 빠져 있는지를. 그가 붙잡고 있는 모든 '깨달음'들이 사실은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의 깨달음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기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짝짓기 번식 경쟁에서 밀려난 공작새처럼, 그는 스스로의 깃털을 자랑하려 했으나, 아무도 그 깃털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허무함을 덮기 위해 망상의 나락으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는 자명하고도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폴은 그 묘사를 보고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이제는 화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증명할 것이다. 자신의 깨달음, 그리고 그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당당히 세상에 드러낼 것이다. 결국 그는 승리할 것이다. '지금의 나를 묘사하는 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폴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화를 낼 이유가 더는 없었다. 그런 분노는 그저 체력의 낭비였고, 자신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시키는 감정일 뿐이었다. 그는 그 이상 허비할 여력이 없었다. 폴은 눈을 감고 자신을 그 세계로 데려갔다. 그는 자신이 묶여있다고 생각했다. 해적들의 배 안, 그가 노예처럼 갇혀 있던 그때처럼. 그때의 쇠사슬은 무겁고 차가웠지만, 지금 그의 정신을 묶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쇠사슬이었다. 그러나 폴은 이곳에서도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그에게 소년의 순수함과 겁 없는 열정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유령처럼 지나갔다. 이게 단지 망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의 모습은 성인이었고, 그 모든 시간의 무게가 어깨에 내려앉은 듯했다. 하지만 폴은, 자신의 정신 속에서 다시금 쇠사슬을 벗어던지고, 하늘 위로 떠오르는 해적선 갑판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현실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기조차도 현실과는 다른 밀도로 가득 찬 공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세상. 저 멀리엔 지붕이 무너진 요정 여왕의 성이 보였다. 하늘 위 해적선의 돛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나무가 신음하듯 귀에 스쳤다. 폴은 갑판에 서서, 공중을 떠도는 이 거대한 선박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었다. 폴은 털보 선장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생각했다. 털보 선장은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인간 노예, 어떻게 탈출했지?” 폴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그 말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털보 선장의 눈빛은 폴을 겨냥했지만, 그 눈빛의 끝에는 무언가 거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숨어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은 폴의 마음속에서 이미 예견되었던 것처럼, 그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 쇠사슬을 풀어버린 것이 아니라, 쇠사슬이 나를 놓아준 것은 아닐까? 그 쇠사슬조차도 나의 존재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것이 아닐까? 폴은 결국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빛처럼 선명했다. 그 동화적인 세상은 원래 폴의 망상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깊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이전의 그가 서 있던 그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비록 저 멀리 요정 여왕님의 분홍색 성이 보이고, 폴이 털보 선장의 해적선을 타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그저 폴의 왜곡된 현실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털보 선장은 갑자기 한 장의 말라비틀어진 나무 그림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는 기괴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으하하하, 이건 나의 가장 고귀한 전리품이지. 이걸 걸고 나와 대결하자!" 털보 선장은 그렇게 소리쳤다. 아니, 폴은 털보 선장이 그렇게 소리쳤다고 믿었다. 그 말이 털보 선장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폴의 망상 속에서 지어낸 말인지 폴을 제외한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폴은 말 그대로 그 누구보다도 멍청하고 바보 같으며, 정신병자일 뿐이었다. 그것은 폴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깨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폴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깨어있고, 이 망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폴은 자신이 진정한 선지자라고 믿었다. 지금의 폴이야말로 정신병자 그 자체가 아닐까?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르는 정신병자. 그것이 그였다. 폴은 털보 선장이 들고 있었던, 폴의 집에도 있었던 말라비틀어진 나무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 그림은 분명히 감시관이 그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는 데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으리라. 감시관의 도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는 단순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흔해빠진 사물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저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더 예쁘게, 더 멋지게 말라비틀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그렇지, 그저 그림이었다. 단순한 그림. 그러나... 내가 눈을 돌릴 때마다 그 말라붙은 가지가 조금 더 뚜렷해 보인다. 폴은, 나와 다르게, 그 단순함을 이해한 걸까? 그렇다면 그가 왜 이 그림을 아직 가지고 있는가? 그걸 그의 손에서 떼어내지 못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건 단순한 그림일 뿐이다. 아니,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저 그림은 어쩌면, 더 이상 폴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저 그림이, 폴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나의 상태들도 대변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닐까? 폴… 그 그림을 나에게 줘야 해. 그래야만 해. 너도 알고 있잖아, 그게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이제 나의 것이야. 나의 내면이 담겨있고, 나의 영혼이 거기 걸려 있어! 폴, 내가 그 그림을 가져가야 해. 그것이 없으면 난 허공에 붕 떠버릴 거야. 그러니 내놔. 어서. 그 그림을 내게 내놓으라고, 폴! 폴, 그것이 네 손에서 벗어나야 해. 그렇지 않으면… 폴, 너도 느끼고 있지? 그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네게서 날아가 버릴 순간을. 그걸 내게 줘. 당장! 그 그림을 주면, 네 깨달음의 가치를… 아니, 그 이상을 내가 인정할 수 있어!  그 그림이 나를 살게 할 거라고! 너의 존재 가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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