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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Sep 26. 2016

秋억 속으로

기억은 ‘상대’적이고 추억은 ‘절대’적이다.

기억과 추억은 확연히 다르다. ‘기억’은 다짐하는 말에도 쓰이는 단어이지만 추억은 그렇지 않다. “내일 너와 만날 약속 기억해둘게.”라고는 하지만 “내일 너와 만날 약속 추억해둘게.”라고는 하지 않는다. 기억은 ‘의식’적으로 신경 쓰는 행위를 포괄한다. 그러나 추억은 그렇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내 인상에 남았다가 되돌아오는 것들만을 추억이라고 한다.     


기억은 ‘의식’적이고 추억은 ‘무의식’적이다.    

  

‘의식’은 어떤 필요성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필요성은 자신이 관계를 맺고 싶은 상대방이 되기도 한다. 상대를 위해 특정 약속, 상황을 기억한다. 향후 있을 관계의 재료가 된다. “내가 기억한 바로는 그랬는데...” 그러나 ‘무의식’적인 추억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거의 없다. 본인의 것이다.   

  

기억은 ‘상대’적이고 추억은 ‘절대’적이다.    

 

계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기 쉽지 않다. 계절은 매년 돌아오기 때문이고, 그 계절을 경험하기 위해 특별히 노력할 필요도 없다. 어느 날 집을 나서면 문득 가을이 와있다. 2016년의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 더웠지만 몇 년 후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2016년 여름 기억해?”라는 대화는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계절은 ‘의식’적 기억의 영역에서 찬밥이다.     


그렇지만 추억의 영역으로 오면 계절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매년 계절은 꾸준하고 비슷하다. 그에 반해 1년이란 시간이 흐른 나는 변덕스럽게도 역시나 달라져있다. 작년과 달라진 자신과 매년 같은 계절의 괴리가 ‘무의식’ 속의 추억을 깨운다. “아, 그때 그랬었지.” 따로 기억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쏠릴 만큼 인상적이었던 순간들을 다시 포착한다.   

    

계절은 ‘무의식’적 추억의 촉매제다.    

  

가을은 정말 희소한 계절이다. 365일 중 고작 몇 주 남짓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을 속에 지금과 다른 내가 있었다. 또 다시 돌아온 이 몇 주간의 가을은 여러 가지 ‘절대’적인 추억을 깨운다. ‘절대’적이라서 고독하지만 ‘상대’적이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의 내 인생을 존중할 수 있다. 의식적으로 정리해서 기억한 것이 아니기에 이것이 진짜에 더 가까울지도 모다. 가을은 종종 혼자여야 한다. 그렇게 ‘추억’ 속으로 간다.    


9월 26일도 가을이 아름답다.

이 계절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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