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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Nov 09. 2016

미친 세상과 '체념'

최순실부터 트럼프까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래방에서 자주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이영현의 '체념'이다. 이 곡이 좋은 이유는 분명하다. 고음 부분 때문이다. 나는 매번 체념의 클라이막스 고음을 올리는 것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고음 자체가 소위 말하는 ‘넘사벽’의 수준은 아니어서 매 나를 다시 도전하게끔 만든다. 그야말로 적당한 수준에서 내 앞에서 까불며 한계를 시험하는 곡인 셈이다. 그러니 재미있고말고! 최고의 노래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불렀던 노래라 20대 초반까지도 나는 ‘체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체념한다는 ‘감정’보다는 체념이라는 이 ‘노래’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노래’에서 ‘고음’을 떠올렸고, 다시 그 ‘고음’에 ‘도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체념-노래-고음-도전. 그래서 ‘체념’하면 ‘도전’이었다. 최소 5년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런데 말이다.


SKY에 가고 싶었던 외고생. 내신 등급제를 폐지한다는 공약을 하나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것을 좋아했던 외고생. 노무현 대통령의 검찰 소환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수학1만 풀던 외고생. 입시 스트레스를 풀 거라고 노래방에서 ‘체념’만 부르던 외고생. 그 외고생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에 조금 귀를 기울이는 ‘26살의 내’가 되었다. 말이 안 되는 결과에 배후를 생각하고, 언론에서 나오는 모든 뉴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습관적으로 거치는, 평범한 대중이자 사회의 성인이 된 것이다.


노래방을 가지 않은지 오래 돼서 그런가, 그냥 나이를 먹어 그런가, 나는 이제 ‘체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노래가 아닌 감정이 울컥 먼저 올라온다. 친한 오빠가 명언이라며 말해준 한 마디가 떠오른다. “나쁜 일은 생겨.” 이 한 마디에 짙게 박힌 체념의 정서가 울력하듯이 가슴 속에서 밀려올라온다. 요새 시국을 보면 더더욱 이 말을 방패로 삼고 숨고 싶어진다. 최순실이고 트럼프고 그냥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체념’하면 그만인 것을.


트럼프 널 미워해야만 하는 거니

아니면 대중 탓을 해야만 하는 거니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야

- 이영현, 체념 (각색)


그렇지만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다는 ‘님의 침묵’의 한 구절처럼. 혹은 ‘체념’하면 ‘도전’을 떠올리던 무식한 18세가량의 내 사고 방식처럼. 약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대한민국이 ‘체념’을 깨고 더 나은 무언가를 향해나가길 바라고자 한다. (단순히 바란다.가 아닌 것은 나 또한 이 시국에서 마냥 희망적이기는 참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16년의 이 ‘체념’이 내일의 불합리에 침묵하지 않는 강렬한 상처가 되길 바라고자 한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다는 분명한 믿음으로, ‘체념’을 넘어 더 나은 대한민국으로의 ‘도전’을 말해야 한다. 그게 평범한 대중이자, 사회의 성인이 해야 할 몫 아닐까.


문득 다시 되짚어보니 2014년쯤, 체념을 부르기 시작한지 한 7년 만에 처음으로 고음을 올렸던 것 같다. 맞다. 노래 한 곡도 성취하는 데 7년이 걸린다.


긴 어둠. 이 미친 세상에서 마음 단단히 붙잡고 ‘희망’을 말하는 인내가 족히 필요해 보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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