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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말고이응 Jan 10. 2017

청춘이라는 가정법

If I were you

돈 쓸 시간은 너무나 많았고 돈은 없었던 대학교 1,2학년 나는 영어 과외를 많이 했었다. 외고생이라는 허울 좋은 스펙으로 남들보다 꽤 쉽게 영어 과외를 구할 수 있었다. 과외비는 30만원에서 40만원 사이였다. 영어 과외는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 최고의 시급을 자랑했다. 이 돈들은 주로 친구들과의 술자리와 데이트에 쓰였다.

      

영어 과외를 할 때 내가 항상 철저히 예습해가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영어의 가정법 단원이었다. 가정법 현재, 가정법 과거, 가정법 과거 완료 등 성문기초영어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법 용어들은 돌팔이 선생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should have p.p. 등등을 가르칠 때면 잔뜩 긴장했다.      


게다가 이제 갓 10대를 벗어난 나는 가정법 용례의 한국어 번역 자체를 상당히 낯설게 봤다. “만약 그때 -- 했었다면, -- 했을텐데.” 실제로 이런 말들이 자주 쓰이기나 하는지 의아했다. 이제 대학교 1학년이 된 내가 쓸 만한 가정법이라고는 “만약 그때 반수했었다면 연고대에 갔을 텐데(허세)”정도 밖에 없었다. 외국어의 습득도 모국어의 사용에 기초한 것이라서, 그래서 가정법이 더더욱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사회인 2년차가 된 지금, 우연히 가정법의 용례에 관한 기사에서 If I were you도 되지만 원어민들은 If I was you도 많이 쓴다는 내용을 읽게 됐다. If I were you가 입에 자연스럽게 붙어있는 내가 지금 과외를 한다면, 아마 If I was you는 틀린 용법이라고 가르치는, 구시대의 영어 과외선생으로 전락할 것이다. 문득 졸업반 즈음 강남 초등학생의 영어 과외를 “걔보다 내가 영어 더 못할 것 같아”라고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뭐가 됐든 현재 내 나이의 진행 방향이 있다면 트렌디에서 트레디셔널로의 길이다. 그 길목에서, 영어 문법으로의 가정법은 많이 까먹었지만 일상 속 가정법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일정 연봉을 받으며 회사에 묶여있게 됐고, 한정된 시간과 돈의 사용을 결정하려면 몇 번의 가정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했다. 예를 들어 ‘친구와 술자리’, ‘데이트’, ‘혼자 영화 보기’, ‘쉬기’, 이 넷 중에 한 개, 많아야 두 개 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오늘 친구를 만나면 술값이... 내일 출근이...”  

   

현실적 한계로 인한 이 지긋지긋한 가정법들에 지칠 때면, 더 큰 가정법을 써본다. “그때 내가 대학원에 갔었더라면.” “그때 이 전공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이랑 계속 함께 했었더라면” 여유 없는 마음에 쪼들려 이딴 가정법 시뮬레이션은 안 돌려봐도 되는 풍족한 삶이 있었을지도.  

   

그래서 가정법 따위 필요 없었던, 영어 과외라는 일주일 4시간의 노동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펑펑 쓸 수 있었던 20대 초반의 그때를 종종 생각하게 된다. 회사에서 술자리를 함께 한 수많은 상사들, 사장부터 바로 윗 선배까지 그들의 20대 초반은 그래서 그들에게 더욱 아름다워 지는 것 같다. 가정법이 필요 없었던 청춘에 대해 끝없이, 끝없이 가정법 용례를 생산해낸다. “그땐 그랬지, 근데, 만약 내가 그랬다던가. 그랬으면...”

    

중학교 시절 처음 If I were you를 배울 때 학원 선생님은 그랬었다. ‘나’가 ‘너’가 될 가능성이 절대 1프로도 없기 때문에 were을 쓰는 거라고, 일부러 문법에 안 맞는 문장을 쓰는 거라고 말이다. 모두의 청춘 또한 절대 가정한 대로 흘러오지 않았고, 흘러올 수 없었기에 아름다운 지도 모른다. 청춘이 가정법의 세계 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사실만 청춘을 지나온 모두에게 유효한 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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