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co Dec 16. 2021

안방 손님과 어머니 (2)

<내맘대로 매탈문학관> 세 번째 이야기

나는 누이 둘과 한날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그런지 다른 식구들보다 더 애틋하고 마음이 가지요. 누이 둘은 얼굴이 서로 많이 닮았어요. 그런데 성정은 딴판이지요. 둘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핏줄은 고사하고 같은 고양이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든답니다.


김소심은 이름 따라 참말로 소심하답니다. 무섬증도 많고 마음도 약해서 걸핏하면 도망치거나 울지요. 우리 고양이들이 원래 겁이 많다지만 이렇게나 겁 많은 고양이는 아마 본 적이 없을걸요.

거기에 소심이는 참말로 말이 많아요. 제 목소리에도 놀라기 일쑤라 큰 목소리도 못 내지만 항상 무언가 종알종알 말하고 있지요. 식구들 기분은 괜찮은지 물어봐주고 언짢아하고 있으면 위로도 다정하게 해 주고.

어찌 보면 그리 말이 많은 것도 참 좋은거야요. 소심이는 집안에서도 거의 숨어있고 움직일 때에도 몸을 낮추고 살금살금 걸어가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거든요. 게다가 늘 구석진 곳만 찾아다니기 때문에 작심하고 찾아도 찾기 힘들답니다. 그럴 때 소심아 하고 부르면 조그맣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참 좋지요.

이상하게도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들 무시하고 비웃기 일쑤인데 소심이만은 늘 맞장구를 쳐주어요. 난 소심이와 가장 사이좋게 지낸답니다.

다정해서 나를 잘 돌보아 주니 나도 소심이를 보살펴 주어야 해요. 겁 많은 소심이를 보호해 주어야 하니 나도 참 바쁘지요.

나는 소심이가 너무나도 좋아서 항상 정수리를 핥아주고 어깨도 감싸 안고 그러지요. 가끔 마구 부비고 치대어서 귀찮게 굴어도 손으로 밀치기만 할 뿐이지 화내지 않는답니다. 다른 누이들 같으면 골을 내며 때리려고 들거나 싫은 소리를 할 텐데. 그러니 내가 소심이를 더 아낄 수밖에요.

소심이는 얼굴이 뽀얗고 귀티가 나는 데다 목소리도 참 고와요. 팔다리도 참 하얀데 밖에 잘 나가질 않으니 검댕 같은 게 묻어서 더러워지는 일도 거의 없어요. 늘 눈처럼 뽀얗고 깨끗하답니다.

소심이는 식구들하고 싸우는 일도 없어요. 다들 소심이가 겁이 많으니 조심스레 대해 주지요.

사냥도 무서워서 못하고 막례 누나가 사냥감을 가지고 들어오면 내 뒤에 숨어요. 집에 파리만 들어와도 겁을 내니까 내가 얼른 잡아야 해요.


그런데 다른 누이 김가칠은 정반대야요. 온 동리 소문난 왈패지요. 진득이 한 자리에 붙어있는 일이 결코 없고 만날 뛰어다니면서 뭔가를 부수거나 망가뜨리기 일쑤입니다. 조용히 걸어 다니는 일이 결코 없고 우르르 뛰어들어왔다 휑하니 뛰어나가곤 하는데 그러고 나면 집에 도깨비가 들었나 싶을 정도야요. 소심이와 딴판으로 겁이 전혀 없고 거리끼는 것도 없어요.

온종일 뛰어다니고 하다 보니 정말 날래서 사냥도 잘하겠지 싶을 텐데. 하도 덤벙거리고 칠칠맞지 못하니 사냥을 잘 못 해요. 겁도 조심성도 없으니 위험한 동물들도 대뜸 잡으려 들어서 크게 다치기나 하고. 식구들 중 유일하게 뱀에게도 물려봤고 지네에게도 물려서 호되게 고생을 했었지요. 그래도 아무것도 겁을 안 내요.

처음 보는 무언가를 봤을 때 고양이라면 응당 도망가거나 멀리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경계를 해야 하는데, 가칠이는 손부터 들이밀고 보지요.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어요.

만날 막례 누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냥한걸 저 달라고 조르기나 하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사냥감을 갖고 있는 막례 누나는 무섭기 그지없는데, 가칠이는 그것도 몰라요. 쥐 같은걸 잡고 싶은데 못 잡으니 화풀이로 마당에 사는 도마뱀 가족을 죄다 잡아 족치기나 하고 그러지요.

과년한 계집애가 음전하지 못하다고 어머니께 꾸중도 셀 수 없이 들었는데 가칠이는 들은 시늉도 안 해요. 달희 누나에게 맞기도 많이 맞고 문희 형도 수없이 타일렀는데 소용이 없지요.

그리고 이건 좀 망측한데... 아직까지 젖을 빨려고 들어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게, 가칠이는 우리가 젖먹이일 때 젖이 부족하지 않게 빨고 컸거든요. 부족이라니요. 항상 가장 잘 나오는 젖을 물고 가장 많이 먹었어요. 어렸을 때엔 그래서 덩치도 가장 컸지요. 지금은 소심이와 내가 더 크지만, 가칠이는 하도 돌아다니고 하다 보니 몸이 무척 실팍하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커단 처녀가 젖을 빨겠다고 자꾸 배로 파고드니 질겁할 일이지요. 어머니 젖만 빨면 다행이게요. 전 식구들의 젖을 빨아요. 난 사내애라 젖도 없는데 자꾸 날 강제로 눕히고 배를 뒤지지요. 싫다고 하면 달겨들어 때리니 어쩔 수 없이 젖 주는 시늉을 하는 수밖에 없답니다.

이런 망측하고도 남사스러운 일이 있나요. 남부끄러워서 어디 얘기도 못하고 식구들끼리 쉬쉬 한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가칠이가 천치 같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머리가 엄청나게 좋답니다. 그냥 호기심이 많아 괴상한 행동들을 할 뿐이지요. 그 좋은 머리를 이상한 궁리 하는데나 희한한 재주를 개발하는 데에 쓰고.

가칠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등에 붙이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난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던데. 그것만 보더라도 결코 평범하지가 않지요.

가칠이는 얼굴이 뽀얗고 눈매가 순해서 퍽 예쁘게 생겼는데 동리의 고양이들은 가칠이가 처녀애인 줄도 몰라요. 다들 사내아이라고 알지요.

이상할 일도 아니지요. 그렇게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는데 한눈에 떠꺼머리 처녀라고 알아보면 그게 더 신기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어여쁜 우리 어머니 김누리가 있지요. 이름이 참말 신식으로 세련됐지요? 우린 다 어머니 성을 따라 김씨랍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아버지에게서 성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아까 막례누나가 가장 예쁜 고양이라고 한 것은 알지마는, 우리 어머니는 내 눈에 세상에서 가장 고운 고양이랍니다. 짤따란 다리에 몸도 통통해서 땅딸막해 보이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처녀 때 인기가 정말 많았다지요. 거기에 어머니는 얼굴도 참말로 커요. 표정도 항상 뚱하지요. 그런 어머니가 아장아장 길을 걸어가고 있으면 풍뎅이 같은 모습이 너무 귀엽다고 온 동리의 사내들이 졸졸 따랐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워낙에 도도한 데다 눈이 높아서 웬만한 사내들한테는 눈길도 안 줬을 뿐만 아니라 변변찮은 녀석들이 귀찮게 굴면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고 들었어요. 우리 엄마는 용감한 데다 쌈질도 잘하거든요. 손은 또 얼마나 맵다고요. 우리 누나들은 어머니를 닮아 그리 도도한가 봐요.

잘 상상이 안 되는 이야기이긴 한데, 우리 어머니는 원래 길고양이였대요. 형 누나들도 길에서 낳았다지요. 정말 갖은 고생을 다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좋은 집을 마련해서 식구들을 들어 앉히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그냥 막 슬퍼져요.

젖먹이들을 건사해야 하는데 잘 먹지도 못하고 지낼 곳도 마땅치 않은 데다 형 누나들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눈앞이 캄캄했대요. 특히나 막례누나는 정말로 위태위태했다지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겠다 싶던 때에 어머니의 아버지가 도와주어 막례누나도 살아나고 집도 마련했대요.

우리 어머니는 늘 무뚝뚝하지만 그때 이야기만 하면 눈물을 짓는데,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며 너무나 고마워한답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인 것 같아요.

그렇지만 뭐, 자기 딸을 보살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난 뵌 적이 없지만 막례누나는 거의 그분이 키우셨다고 하니 혹시 막례누나는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싶어 물어보면 막례누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아요.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참 다정다감했는데, 우리 몸이 커지고 돈가스라는 것을 먹고 나니까 좀 냉정해졌어요. 그리고는 거의 매일 나한테 언제 독립할 거냐고 묻지 않겠어요.

아니, 문희형처럼 덩치가 집채만 한 장정도 집에 눌러앉아 사는데 나같이 작고 어린 고양이가 무슨 독립을 하나요? 밖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난 절대로 안 나가고 엄마 곁에 꼭 붙어서 살 거야요.

어머니는 내가 고집을 피우니까 그럼 나가서 집이라도 지키라고 닦달을 하겠지요.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리고 문희형에 곤희형, 달희누나까지 사냥개처럼 눈을 번득이면서 누가 침입하지 않는지 살피는데 내가 거든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난 그냥 집에서 소심이나 지켜줄 거야요.

어머니는 날 찰싹찰싹 때리면서 구박해도 내가 꿈쩍도 않으니 이제 더는 나를 들볶지 않아요. 한숨을 쉬면서 짜증을 내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썩 마음이 좋지는 않지마는 난 이곳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절대 떠나지 않고 엄마랑 형들이랑 누이들이랑 같이 살 거야요.


어머니는 집에 하숙을 놓아 우리가 먹고 산답니다. 우리 집은 꽤 크거든요. 커다란 거실을 우리 식구가 쓰고 안방과 마당은 하숙을 놓았지요.

우리가 집주인인데 왜 안방을 쓰지 않고 하숙을 놓는지 나는 참으로 이상스러워요. 그렇지만 거실이 훨씬 넓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쉬운 데다 볕과 바람도 잘 드니 그런가 보다 하지요. 우리 어머니가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어머니는 정말, 세상에서 제일로다 똑똑하거든요.


마당에는 원래 네 식구가 세 들어 살았는데 지금은 오누이 둘만 남았어요. 셋방 아주머니는 원래 우리 어머니하고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지요. 그래도 달리 갈 곳이 없는 데다 어머니도 맘 속으로는 그네들이 안타까웠는지 그냥저냥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셋방 아주머니가 막내딸만 데리고 이곳을 떠나 버렸어요.

떠나기 전날 별안간 아주머니가 어머니를 찾아와서 제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는데, 어머니는 영문도 모르고 그러마고 했다지요. 그러고는 다음날 사라져 버려서 어머니는 얼결에 셋방 남매까지 떠맡게 되었어요. 지금도 어머니는 캣닢에만 취하면 그 여편네가 안 하던 소리를 할 때 알아채고 다리를 분질러 놓았어야 했는데 하고 신세한탄을 하지요.

둘이 아웅다웅하면서 대거리를 했어도 정이 많이 든 데다 서로 애들도 봐주며 친구처럼 지냈다는데, 어머니가 워낙에 무뚝뚝하니 그렇다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셋방 아주머니가 없으니 마음이 쓸쓸한 것 같아요. 요즘도 문득문득 아주머니 얘기를 하는데, 바로 어제만 해도 마당을 내다보며 그러지요. 대체 무슨 재주로 자식 셋을 다 다르게 낳아놨는지 신기하다고. 사실 동리의 아주머니들은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을 죄다 노랗게 낳은 어머니가 신기하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남들이 그리 말하는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이리 해서 지금은 마당에 두 남매가 세 들어 사는데, 아주머니가 떠난 이후로 어머니 눈치가 보이는지 무척 겁을 내어요. 가끔 쥐도 잡고 새도 잡아서 하숙비로 내지마는 제때 주지는 못하고 많이 밀리는데 어머니는 그네들이 안쓰러운지 모르는 척 하지요. 형 누나들과 또래인 데다 남매가 둘 다 순하고 무르다 보니 보는 어머니 마음이 안되었나 봐요.

예전에 아주머니 계실 때에는 영역을 칼같이 지키도록 매섭게 굴었는데 이제는 다 제 새끼려니 하고 딱히 구분 두지 않는 것 같아요. 특히나 운섭이 형은 걸핏하면 집에 들어와서 드러누워 있거나 저녁도 먹고 가는 일이 예사인데 어머니는 당신이 계시면 불편할까 봐 자리를 피해주기도 해요. 그리고 곤희형과 달희누나에게 셋방 식구들 불편한 것 없게 잘 보살펴 주라고 당부하는 것도 내가 저번에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는 참말로 천사라니까요.


셋방 오누이는 참으로 의좋게 잘 지낸답니다. 우리 집은 식구가 여덟이나 되는데 저들은 세상천지에 둘밖에 없으니 의지하는 곳이 서로밖에 없나 봐요.

예분이 누나는 참으로 어른스럽고 참하지요. 얼굴만 보면 동생인 운섭이 형과 꼭 닮았는데 희한하게도 예쁘게 생겼어요. 운섭이 형은 어딘가 좀 어리숙하고 우습게 생겼거든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가칠이와 소심이와도 좀 닮았어요. 등의 무늬가 가칠이와 비슷해서 멀리서 보면 한 번에 구분이 잘 안 되지요. 우리 동리에 노란 고양이는 우리 집 식구들 말고는 없는데 예분이 누나는 노란 데다 내 누이들과 닮은 탓에 우리 집 식구라고 알고 있는 이들이 많아요.

예분이 누나는 제 핏줄인 운섭이 형만 잘 보살피는 게 아니라 우리들한테도 퍽 고맙게 굴지요. 밖에 잘 나가지 않는 소심이가 어렸을 때 곤희형을 따라 밖에 나갔는데 곤희형은 운섭이 형과 노느라 소심이를 살피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있어요. 소심이는 오빠들을 곧잘 따라나서는데 소심해서 노는데 잘 끼지도 못하고 놀아달라고도 못하거든요.

그때 예분이 누나가 곤희형과 운섭이 형을 타박하고는 구석진 곳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소심이를 달래 주었지요. 그 뒤로 소심이는 예분이 누나를 잘 따른답니다. 예분이 누나는 귀찮아하는 법 없이 소심이가 마당에 나오면 잘 돌보아주고 놀아 주지요. 참말로 마음 씀씀이가 곱지 뭐야요.

예분이 누나는 운섭이 형을 제일로 아끼고 싸고돌지만 형이 물색없이 우리 식구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무척 근심이 많아요. 운섭이 형은 달희누나와 곤희형과 친한 동무 사이인데 혹여라도 같이 놀다가 우리 어머니 눈 밖에 나는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여 늘 운섭이 형을 단속하고 주의를 주지요.


운섭이 형은 하얀 바탕에 갈색과 검은 줄무늬가 일부분 있는 고양이인데, 이마에 마치 사람들 눈썹마냥 줄무늬가 있어요. 그런데 치켜 올라간 모양이 아니고 축 내려오는 모양이라 운섭이 형은 늘 울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요. 커다란 덩치에 늘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다니니 참 재미나게 생겼지 뭐야요.

운섭이 형은 눈치가 빠르고 겁이 많은데도 어딘지 모르게 주책맞은 데가 있어서 보고 있자면 참 재미가 좋답니다. 우리 집 식구 전부에다 예분이 누나까지 노랗다 보니 운섭이 형은 저도 노란 줄 알지요. 태평하게 마당에 퍼질러 누워서 자기 몸을 핥다가 등의 검은 털을 발견 하면 화들짝 놀라는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배꼽이 빠질 것 같아요.

저만 노란 고양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소외감이 드는지 시무룩해하다가도 달희 누나가 달래주면 또 금세 풀어져서 기운을 차리는 모양새도 우습고요. 거기에 곤희 형까지 합세해서 운섭이 형의 하얀 털 부분이 누르스름해 보인다고 맞장구를 치면 또 저가 노란 고양이가 맞겠거니 해요. 그럴 때는 내가 가서 형은 하얗고 까만 고양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달희 누나에게 혼날까 봐 그리 못하지요.

운섭이 형은 밥이 그리도 맛이 있는지 살이 계속 찌는데, 이제는 거의 문희 형만 하지요. 그런데 어찌나 겁이 많은지 그 덩치가 하등 쓸모가 없어요. 마당에서 살고 있으니 큰형 작은형이 집을 지키는 걸 도와주면 힘이 될 텐데, 누가 침입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을 가지요.

저번에는 달희 누나와 노는 중에 불량배와 시비가 붙었는데, 달희 누나가 앞에 나서서 쏘아붙이는 동안 슬그머니 달희 누나 뒤로 숨지 않았겠어요?

저보다 한참 작은 달희 누나 뒤에서 가려지지도 않는 몸을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었다는데, 문희 형이 그 모습을 보고 운섭이 형한테 화를 내었지요. 그러니까 예분이 누나가 달려와서 운섭이 형을 감싸고돌고, 그러다 보니 문희 형하고 예분이 누나까지 크게 다툴 뻔했지 뭐야요.

난 가끔 운섭이 형을 골려주는데, 운섭이 형은 무척 약 올라하지마는 내가 주인집 아들이라 뭐라고 못하지요. 예분이 누나가 그냥 참으라고 하거든요. 대신 달희 누나한테 들키면 난 크게 혼이 나는데, 주인집에 산다고 생색내는 거냐고 역정을 내지요.

그렇지만 난 형이 셋방에 산다고 괴롭히는 게 아니라서 무척 억울해요. 달희 누나가 나한테는 앙칼지게 굴면서 제 동무한테는 세상 너그럽고 사근사근하게 대해주는 모양을 보는 게 배알이 뒤틀리거든요.

난 운섭이 형이 그 큰 덩치를 하고 속없이 달희 누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양새가 혹여라도 누나에게 딴 맘을 품고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경고해 주려는 건데. 달희 누나는 속도 모르면서 네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퉁을 놓지 뭐야요.

그렇지만 난 계속 지켜볼 거야요. 마귀할멈 같은 달희 누나이지만서도 운섭이 형은 우리 누나에게 한참 못 미치니까요. 어쭙잖은 수작을 건다면 두고 보지 않을 거야요.


음. 그리고 또 누가 있지. 아. 금희가 있네요. 금희는 세 들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식구도 아닌데 우리랑 같이 살고 있으니 희한하지요.

금희는 색도 노랗고 곤희 형과 내 얼굴을 쏙 빼닮았기에 우리 식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마는 그렇지 않아요. 성만 해도 우리는 김 씨인데 금희는 조 씨이니 같은 식구 일리가 없지요.

금희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우리 집에 굴러들어 왔어요. 야심한 밤에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와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어대지 뭐야요. 얼굴도 빼닮았는데 목청까지 곤희 형만큼이나 좋으니 다들 영문을 몰라 작은 형만 쳐다보았지요.

거기에 말은 소심이만큼이나 많은데 너무 어려서 뭔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난처했어요. 얼핏 '배가 고프다' '엄마' '아프다'라는 내용만 겨우 알아들었답니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나면 갈 줄 알았는데 그대로 눌러앉지 뭐야요. 나가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척 갸우뚱하면서 엉덩이 비비고 자리를 잡는데, 뭔 어린애가 그리 반죽이 좋은지 그것까지 곤희 형을 빼닮았지 뭐야요.

하도 작아서 젖먹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보다는 나이를 먹었더라고요. 워낙 굶어서 저리 못 크고 애볐지 싶으니까 그건 또 맘이 안 되었고...

그래도 집에 워낙 식솔들도 많고 하니 다들 금희를 기꺼워하지 않았는데, 못 먹어서 비쩍 마른 아기가 몸에 진드기를 더덕더덕 붙이고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입이 터져나가도록 꾸역꾸역 밥을 먹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나니 다들 누그러져 버렸지요.

게다가 갓 태어난 생쥐만 한 녀석이 어찌나 눈치가 빠르고 넉살이 좋은지 금세 언니, 오빠 하면서 친하게 굴지 않겠어요. 어찌 생판 남이 곤희 형을 그리도 닮을 수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어요. 어머니도 때때로 의심스러운 눈으로 작은 형을 살피지요. 곤희 형 좋다는 아가씨들이 동리에 참 많았는데, 돈가스를 진즉에 먹지 않았다면 빼도 박도 못했을 테니 곤희 형은 가슴을 쓸어내렸겠지요.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같이 살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원래 살가운 성격도 아닌 데다 식솔이 느는 것이 내키지 않으니 드러내 놓고 타박하지는 않아도 금희가 영 못마땅하겠지요. 게다가 마실 갔다 만난 옆집 아주머니가 "문희엄마. 늦둥이 봤어?"하고 묻는 바람에 어머니 기분이 몹시 나빠져서 들어왔지 뭐야요.

그럴 때는 눈에 안 뜨이는 것이 방법이라 다들 숨어서 어머니 얼굴만 살피는데 금희가 싹싹하게 굴겠답시고 엄마라고 부르며 매달렸다가 볼기를 호되게 맞고 나가떨어졌지 뭐야요. 말했다시피 어머니는 손이 무척 매운데도 금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떡 일어나 엉덩이를 쓱쓱 문지르고는 다시 다가와서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아양을 떨겠지요. (맷집이 좋은 것도 곤희 형을 닮았어요)

어머니는 학을 떼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뒤로 금희에게 많이 너그럽게 대해준답니다. 성격이 성격인지라 그리 다정하게 굴지는 않지만 내치지도 않으니 어머니로서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푸는 거지 뭐겠어요.

나도 처음엔 금희가 마뜩잖았는데 이젠 그러려니 하지요. 난 누이들한테 오라버니 대접받을 일이 없는데 (한 번은 가칠이에게 날 오라비라고 부르라 했다가 머리를 두들겨 맞았지요) 금희가 오빠 오빠 하면서 졸졸 따르니 기분도 좋고 날 닮은 얼굴이 귀여워 보이기도 해요.

게다가 난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으니 식구들이 전부 나가고 나면 혼자서 좀 심심한데 금희가 좋은 동무가 되지요.

그런데 조금씩 자라면서 약간 걱정이 되는 것이, 금희가 곤희 형의 외양과 성격을 쏙 빼닮았는데 이제는 가칠이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종일 지치지도 않고 장난을 치는 것이나 꾸지람을 들어도 조금도 기죽지 않는 모습이 가칠이와 똑같지 뭐야요. 지금은 조그마하니 괜찮지마는 다 자라서 성격이 가칠이 같다면 누가 감당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방 손님과 어머니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