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와이너의 책 리뷰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는 왜 죽는가?
철학은 이런 질문을 다루지 않는다. 철학이 다루는 질문은 "어떻게"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철학에서 다루는 질문이다. 때문에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대충 2년 전쯤,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었고, 철학에 눈을 뜨게 해 준 책이었다.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헌법을 무시하는 행동. 그런 행동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 행동. 법을 위반해도 권력 때문에 처벌하려고 하지 않는 행동. 지금이 21세기가 맞는지 의심이 들게 하는 행동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철학의 부재로 본다. "어떻게"에 대한 질문을 포기한 대가로 이런 끔찍한 일들이 발생했다. "어떻게"를 통한 본질을 보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런 비상식적인 재앙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 AI 기반 사회의 빠른 변화의 중심을 느린 철학이 잡아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독서법을 적용해 봤다. 이전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기록하고, 내 생각을 덧붙였다. 그냥 말 그대로 독서 기록이었다. 이번에는 책을 쭉 읽으면서 각 챕터마다 키워드나 Key Phrase를 기록하고 책이 다 끝난 후에 키워드에 대한 내 생각을 쭉 적어봤다. 키워드 중심으로 내 생각을 펼치는데 더 중점을 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록은 순전히 나를 위한 기록이다.
1장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우릴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건 활동이지 알람 시계가 아냐"
인간 역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인간 역시 관성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외력이 있어야 한다. 나를 침대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약속과 활동이라는 외력이다. 이 활동이 재밌을수록 혹은 급할수록 더 큰 외력이 작용한다. 그 덕분에 나는 더 쉽게 침대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나 자신을 더 부지런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선 나를 침대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재밌는 활동이 많아지면 된다. 하지만 침대의 인력보다 더 큰 인력을 갖고 있는 활동은 많이 없기에, 나는 좋은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습관은 관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좋은 습관을 들면 관성을 이겨내기 위한 외력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처음에 습관화하는 것은 매우 힘들겠지만, 습관이 들면 적은 외력으로도 부지런해질 수 있다.
의무감과 사명감의 차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의무'와 '사명'을 구분한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고 표현한다. 사명감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행동을 이끌어내고, 의무감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 하는 행동을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르쿠스에게 침대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명이다.
굳이 왜 침대 밖으로 나가야 하는가?
우리는 왜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걸까? 침대에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나?
나는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는다. 이것은 그냥 나의 믿음이자 대전제다. 침대에서는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침대의 인력을 이겨내고 밖으로 나가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훌륭한 이야기 소재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침대 밖으로 나가고, 침대 안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 죄책감이 느껴진다.
2장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질문을 경험하다
"우리는 질문을 경험하기보다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질문을 경험한다는 것은 뭘까?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경험했다. 그는 질문 자체를 탐구했다. 여러 각도, 여러 관점에서 질문을 봤다. 그리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답이 없는 질문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의견과 새로운 질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경험하면서 많은 새로운 질문들을 던졌고, 철학은 이 과정을 통해서 발전했다.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아주 천천히 생각하면서 질문과 문제 자체를 탐색했다.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
그렇다면 왜 문제 자체를 탐색하는 것이 중요한 걸까? 왜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보다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라고 말하는 걸까?
빠른 문제 해결이 더 좋다, 느린 철학이 더 좋다는 비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어떤 문제는 분명 빠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점 중 하나는 천천히 꼼꼼하게 검토해야 될 답이 없는 질문까지 빠르게 답하려고 하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고 그 질문으로부터 파생되는 짚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질문을 무시하게 된다. 그리고 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는 대부분 답이 없다. 아마 그래서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3장 루소처럼 걷는 법
"정신은 시간당 5킬로미터의 속도, 즉 걷기에 적당한 속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정신은 신체와 함께 움직인다. 믿음에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이 따로 분리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최소 살아있을 때만 생각하면 정신과 육체는 항상 함께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시속 5킬로미터로 가면, 정신도 시속 5킬로미터로 간다. 그리고 루소는 이 속도에서 정신이 가장 활발해진다고 말한다. 아마 경험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한다. 루소의 경험이기 때문에 일반화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이 꽤 맞는 것 같다. 혼자 코펜하겐을 구경하면서 정말 많이 걸었다. 그리고 정말 많이 생각했다. 이상하게 걸을 때는 머리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내가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평소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기 편해진다. 덕분에 코펜하겐 여행에서 정말 많이 배웠다.
4장 소로처럼 보는 법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챕터다.
보는 방식 그리고 보편 법칙; 의미를 너무 빨리 창출한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볼 게 많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작은 핸드폰 스크린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상황까지 볼 수 있다. 나는 양(Quantity)과 밀도가 반비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끔 볼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의를 뺏어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뭐 하나 제대로 보는 게 없다. 하나에 오래 집중하고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경험이 매우 적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보는 방법을 알려주는 소로가 너무 고맙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내가 이 책을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 어쩌면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일 수도 있겠다. 2년 전 이 책을 읽고 나는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이 되는 걸 목표로 살았다. 하지만 그게 잘되지 않았다. 책을 다시 읽어보면서 내가 이 문구에만 초점을 두고 "어떻게"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분명 소로는 이 책에서 그 방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보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여러 각도에서 최대한 천천히 의미를 창출하는 방법으로 봐야 한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나는 사회의 속도에 적응하여 천천히 보는 방식을 익히지 못했고, 낙원에서도 흠을 찾았다. 예전의 목표기도 했지만, 나는 또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나는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름다움은 이해하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좋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게 일시적인 장점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냥 잠깐 좋은 것이고, 눈을 감는 순간 혹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순간 크게 의미가 없어진다고 믿었다. 이번에 스위스 여행을 가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고 나서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설명할 수 없는 영구적인 변화가 일어난 느낌을 받았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에 조금 더 다가간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5장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이 챕터에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보다 인상 깊은 문구들을 적어봤다.
음악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가 내게 말한다.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의 본질을, 내용 없는 그릇을 전달한다.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구체적인 슬픔이나 구체적인 즐거움이 아닌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와 즐거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감정에서 추출한 정수"라고 표현한다. 슬픔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언가에 관한 슬픔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파 영화를 보거나 레너드 코헨의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극적인 사건에 덜 몰입하면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감정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있으며, 슬픔 안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게는 느린 멜로디가 가장 아름다운 슬픔이었다.
모든 페티시 fetish에는 정반대에 있는 혐오가 똑같이 따라오고, 모든 열정에도 상보적인 짜증이 따라온다. 쇼펜하우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강렬 한 음악 사랑은 그에 상응하는 소음 혐오를 낳았다.
6장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필요한 욕망, 불필요한 욕망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분석해서 욕망을 분류했다: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자연스럽고 반드시 필요한 욕망은 사막을 지나고 마시는 물 한잔 같은 것, 자연스럽지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욕망은 사막을 지나고 마시는 소박한 와인 한 잔, 자연스럽지도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은 사막을 지나고 마시는 비싼 샴페인 한잔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욕망은 충족시키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나는 물욕이 많다. '견물생심' 나랑 너무 잘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필요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은 것들이 자꾸 눈에 보이고 내 욕망을 자극한다. 이 물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없어도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갖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슴에서 나오는 욕망이 머리의 이성과 싸운다. 매번 이성이 사지 말라고 판결하지만 저 마지막 욕망이 계속 항소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글을 쓰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양한 쾌락, 더 많은 쾌락
에피쿠로스는 쾌락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에어팟이나 아이폰을 사는 것은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이라고 말할 뿐이다. 더 다양한 쾌락은 더 많은 쾌락이 아니기에 우리는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우리의 소비문화가 다양한 쾌락이 곧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잘못된 전제가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한다. 쾌락의 다양성은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충분히 좋은 것
이 작가는 에피쿠로스에 대해 배우면서 "충분히 좋음"의 개념을 배우고 이런 말을 남긴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충분히 좋음을 너무 무시한 것 같다. 현실에 감사하기보단 항상 더 좋은 것을 바랐다. 그래서 항상 과거의 편리를 그리워한다. 유럽에 1년 정도 살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편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얼마나 주변에 감사할 게 많았는지 알게 됐다. 만원 안쪽으로 먹을 수 있던 맛있는 음식들, 24시간 하는 매점, 잘 터지는 와이파이, 피시방, 노래방, 등... 나는 유럽에 와서야 이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들에 감사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교훈 때문에 나는 유럽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충분히 좋음을 즐기면서 살고자 한다.
7장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관심과 집중
집중은 강제할 수 있다. 하지만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혹은 어떻게 하면 이 분야에 관심이 생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관심은 강제할 수 없다. 나는 물리에 관심이 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물리에 관심이 있는 건지, 세상을 알아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건지 헷갈린다. 나는 핵융합에 관심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원자력및양자공학과에 진학했고, 플라즈마 물리 수업을 들었다. 핵융합에 '집중'했다. 성적도 꽤 잘 나왔다. 근데 그 '집중'이 오래가지 않았다. 서서히 내 관심이 의심되기 시작했고, 나는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좋은 분야지만, 내가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우리가 가장 귀중한 선물을 얻는 것은 그것을 찾아 나설 때가 아니라 그것을 기다릴 때다.
현재 나한테 가장 귀중한 선물은 내 관심사를 찾는 것이다. 곧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를 시작할 텐데, 어떤 분야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니 참 답답하다. 지금까지 나는 내 관심 분야를 찾기 위해서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했다. 개별 연구도 해보고,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쓰고 찾아가 10명 이상의 교수님께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못 찾은 것을 보니, 이제는 기다릴 때가 됐나 보다. 내 할 일을 꾸준히 하면서 기다리면 나한테도 깨달음이 오지 않을까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