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기억들
기간: 고등학교 1학년 ~ 3학년
9년마다 찾아오는 3가지 재난이라고 하는 '삼재'를 들어봤을 것이다. 나는 무속신앙을 안 믿는 편이지만 이때만큼은 진짜 내가 삼재 기간이었던 것은 아닐지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된다. 그만큼 이 시기는 심적, 물리적 고통이 너무 극심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던 사건이 있었고, 그게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힘들게 만들었다.
고등학교는 꽤나 명문이라고 알려진 그런 학교였다. 규율이 엄격했고, 체벌이 존재했다. 환경이 또 바뀌면서 나는 다시 겉돌게 되었다. 사교성이라고는 1도 없는 나였기에 친구를 만들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엎드려 잠을 자는 일이 많았다. 중학교 때 있었던 일진이나 양아치는 딱히 없었다. 없는 건지 아니면 고등학생이니까 자제를 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공부의 양이 늘어나고, 난이도도 높아졌는데 내 지능은 그걸 따라가지 못했다. 공부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서 내 의지가 아닌 남의 의지로 하려다 보니 마치 물을 먹고 짜내지 않은 스펀지처럼 지식이 머리에 흡수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절반이 공부를 안 하는 애들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해도 반에서 상위권은 되었지만 고등학교는 달랐다. 인문계 고등학교라서 그런지 그래도 공부를 해보겠다는 애들이 몰려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해서는 치고 올라가기 힘들었다. 그런 곳에서 나는 공부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1학년 때의 기억이 딱히 안 나는 걸 보면 큰 사건사고는 없었던 것 같다. 문제는 2학년 때였다.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부족한 나는 엄청난 도전을 감행했다. 갑자기 반에서 반장을 맡은 것이다. 어떤 한 친구가 선생님께 부탁해서 반장이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얼떨결에 다른 친구의 추천으로 같이 후보로 올라갔고, 덜컥 내가 당선이 되어버렸다(나 때문에 반장을 못한 그 친구는 그 뒤로 몇 번이고 농담 삼아 나를 놀렸다). 이것이 내가 고등학교 시절 겪게 되는 가장 큰 사건이었다. 나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이 사건의 큰 충격으로 인해 그날 잠을 못 잤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반장이 되었고, 어머니도 걱정을 태산만큼 짊어진 채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반장이 되었지만 사람을 대할 줄 모르는 나였기에 같은 반 아이들과 마찰이 많았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서 굴러들어 온 애가 갑자기 반장을 맡았는데, 어리숙하고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욕은 욕대로 먹고, 선생님께 혼나기도 하고,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다. 정말 힘들었지만 시작한 도전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은 앞서는데 몸과 머리가 따라주지 않으니 나도 미치도록 답답했다. 울기도 했고, 화가 나서 잠을 설치기도 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때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진짜 고생했지?"라며 묻곤 하신다.
스트레스 때문에 더더욱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놈의 공부, 공부, 공부. 가뜩이나 여러 가지로 신경을 쓰고 있는데 이 망할 공부는 끝이 없었다. 수능이라는 초거대 산을 넘어야 끝나는 일이었다. 성적은 반에서 중간을 벗어나지 못했고, 반장이라는 직책을 겨우겨우 끝낸 후에 3학년에 올라갔다.
3학년이 되고 나서 수능이라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진까지는 아니지만 재수 없는 몇몇 인간들의 횡포를 견뎌야 했다. 3학년 학급 편성을 조금 특별하게 하다 보니 최상위권과 하위권이 함께 묶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 하위권 안에 그놈들이 있었다(생각해보니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른 애들을 때리는 일이 없었다. 꼭 공부를 못 하는 애들이 그러더라. 지능 탓일까?). 그놈들은 장난이라고 하면서 나를 포함한 몇 명을 때렸다. 장난이 도가 지나치면 그게 장난인가? 아마 가해자는 기억 못 하겠지. 당시 담임선생님도 전혀 모르셨을 거다. 선생님께 말하면 고자질했다고 또 괴롭힐 게 뻔하니까 아무도 그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애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수능산을 넘으려고 발악을 하는 와중에 그런 인간들 틈에 껴있으려니 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화병이 안 걸린 게 신기할 정도다.
매일매일 그런 시달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간혹 즐거운 순간이 있었을 테지만 고등학교 시절 전체를 놓고 보면 나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것 같다. 지금 내 주변에 남아있는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나는 그때의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멀어진 것은 아닐까?
"이 또한 지나가리니"
시간은 흘러 무사히 수능을 치렀고, 그냥 내가 받을 수 있는 성적 그대로 받았다. 내 성적을 본 선생님의 추천으로 지방에 위치한 공대에 지원했다. 초중고 12년의 긴 학창 시절을 뒤로한 채 여전히 내성적이고 어리숙한 아이는 갓 20살이 되어 대학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