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1순위는 엄마였다. 당연한 이야기같지만, 70이 넘은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빠의 형제도 자식도 아닌 아내를 제일 위한다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아빠가 독특하다는 건 알았지만, 아빠 세대에 아내를 어머니보다 우선시 하는 게 그렇게 특별한, 아니 특이한 일인줄은 몰랐다. 왜냐면 내가 결혼을 하기 전까지 그 일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나서 시아버님을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지난 일들을 떠올리고 자각할 수 있었다. 아빠가 얼마나 특이한 아들이었는지를.
우리는 언제나 명절에 친가와 외가를 다녀왔다. 할머니댁에서는 대부분 구정과 추석 당일 외가로 출발했다. 점심을 먹고 가라는 할머니의 말씀에도 아빠는 늘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외삼촌들이 모두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어서 외삼촌들 얼굴을 본다고 더 서둘렀던 기억이 난다. 외갓집에 가지 않은 명절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집전화가 울리고 엄마가 받았다.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통화를 이어간지 1분, "왜?" 아빠는 물었다. "그냥 안부전화예요."라고 답하는 엄마의 말에도 아빠는 수화기를 뺐었다. "어무이, 무슨일이십니꺼?" 매번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할머니나 고모, 삼촌과 통화를 오래하게 두지 않았다. 무슨 일로 통화를 하는지 늘 궁금해했고 안부전화 외에 말이 길어지면 바로 끼어들었다.
몇년 전 고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할머니 곁에 사는 고모가 할머니를 케어하는 게 힘들다고 엄마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엄마는 고모 덕분에 엄마와 아빠가 덜 신경쓰며 살 수 있는거라고 늘 고모에게 고마워했기에 고모의 힘듦을 잘 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생각이 달랐다. 아빠는 엄마 전화기를 가져갔고 엄마는 방문 앞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동생아, 엄마때문에 힘들면 나에게 전화를 하거라. 내가 들어주마. 부모때문에 힘들면 자식끼리 통화하자. 언니는 자식이 아니잖니."
언젠가 남편이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싶다고 했었다. 제대로 인사를 드린 적도 없는데 어버이날이나 할머님께 선물을 드리고 싶다고. 아빠를 닮은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마음이어서 아빠에게 여쭈어봤었다. 아빠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남편의 마음도 있었기에 할머니 계좌번호를 주셨다. 돈을 보내고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고맙구나. 그런데 한번이면 된다. 할머니는 아빠 몫이니 너는 신경쓰지 말거라."
아빠는 친가일에 있어서 최고 의사결정권자였다. 그리고 친가와 관련된 모든 일은 직접 정리하고 처리했다. 나는 아픈 할머니를 간호하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대신 아픈 할머니를 위해 병원을 알아보고 간병인을 알아보고 고모, 삼촌, 병원과 통화하는 아빠를 본 기억은 있다. 아빠 혼자 할머니댁을 가신 적은 있지만, 엄마를 혼자 할머니댁에 보낸 적은 없었다. 엄마는 늘 아빠와 함께 할머니댁을 갔었다.
아빠는 그 시대에, 그리고 나의 시어머님이 원하는, 며느리가 해야하는 일들을 애초에 만들지 않았다. 엄마는 할머니댁에 김장을 하러 간 적이 없고 할머님 생신상을 차린 적이 (내 기억에는) 없다. 고모나 삼촌 생일을 챙긴 적도 없다. 고모와 삼촌이 할머니를 위해 수고한 일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해 응대하는 것 또한 아빠의 몫이었다. 고모와 삼촌에게 엄마가 전화를 하는 건 당연한 게 아니라, 일종의 보너스였다.
그렇게 친가와 관련된 일은 모두 아빠 선에서 끝났다. 결혼 후 아빠는 남편에게 말했다. "하나만 부탁하자. 자식으로 도리는 하되, 효도는 하지 말거라. 너희 삶의 중심은 너희지 양가 부모님이 아니란다. 다른 가족을 신경쓰다보면 다른 가족때문에 너희 인생이 중심을 잃을 수 있단다. "
아빠는 그 시대에도 비범했고, 요즘 남자들과 비교해도 비범하다. 아빠의 방법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할머니와 아빠 형제들은 누가봐도 호락호락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아빠는 가끔 으스대며 엄마에게 말한다. "당신 나 아니었으면 아휴. 못 버텼디."
효도를 하지 말라는 아빠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효부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코로나를 제외하고는 일년에 두세번씩 시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다녔고 시누이 가족이 함께 할 때도 있었다. 결혼 첫 해에는 매주 시부모님과 식사를 했고 결혼하고 5년 동안은 시부모님 생신때 백화점에서 케이크를 예약했다. 지금은 암에 걸린 시아버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닌다. 물론 시어머님에게 고맙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매주 식사를 할 때도 안부전화를 안한다고 뭐라고 하셨던 분이니까.
아무리 비범한 아빠여도 자식의 인생까지 비범하게 만들 순 없었다. 매일 생각한다. 나는 어디쯤 와 있는걸까. 몇 세기를 퇴보한 느낌이랄까. 아니다. 은하계가 형성되기 전으로 퇴보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시어머니에게 나는 시집살이 안하며 편하게 사는 미래 사람이다. ??? 시어머님은 도대체 어디쯤 계신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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