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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눈물

친정아버지 그리고 엄마

by Lime Eden

미국 사람들은 뭐든지 좋기만 하면 beautiful 이란다.

동네 산책을 할 때 레트리버 우리 라임이를 보고 beautiful , 날씨만 좋아도 beautiful , 병원에서 환자 혈압이 좋아도 beautiful , 마음에 들기만 하면 beautiful이라고 행복해한다.

또, 매사가 쑥스러워 표현이 어려운 한국 정서와는 달리, 통화할 때마다 만날 때마다 가족에게 I love you를 남발한다.

어떻게 보면 그저 의미 없이 입버릇처럼 I love you 하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다.

그런데 , 한국 정서의 나로서는 사랑한다 라는 표현이 참 어색하고 어렵다.

아들딸에게는 그래도 사랑한다 우리 아들, 사랑한다 우리 딸 표현하기 쉽지만 나도, 우리 부모도 돌아보면 서로 사랑한다 표현을 해본 적이 드문 거 같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는 참 말이 없으신 분이셨다.

원래 성품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지만, 어릴 적 아버지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7남매의 큰아들인 아버지는 돈이 없어 제대로 학교를 못 다니셨다 했다. 그래서 늘 못 배운 게 한이라 하셨다.

그런데, 술이 들어가면 얼굴이 벌게지면서 기분이 업 되면서 어떤 때는 무섭게 소리를 지르고 …

살림을 깨부수고 … 엄마에게 손을 대고 …

그래도 자식들에게 욕을 심하게 하거나 때리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엔 ,

우리 큰언니는 무서워 우는 동생들을 구석 작은방에 모아 이불을 씌우고 같이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를 시키고..

때로는 옆집에 피신도 시키고, 때로는 아버지 몰래 여관방에 숨어 있는 엄마에게 우리를 데려가기도 했다.


엄마는 부잣집 딸로 부유하게 자라다 말 그대로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아버지와 눈이 맞아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마음은 선하고 남에게 퍼주기 좋아하고 사람을 쉽게 믿고 , 어릴 때 여유 있게 쓰던 버릇이 있어서

씀씀이가 늘 컸고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생활비 보다 늘 더 쓰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는 아버지 몰래 돈을 여기저기 빌려 쓰다 점점 빚을 만들어 빚쟁이가 집에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와 싸움이 잦아지고 엄마는 아버지를 피해 며칠 몇 달 집을 나갔다 들어오고를 반복했다.


나는 때로는 엄마가 불쌍하기도 했다가 수도 없이 빚을 지고 집을 나가고를 반복하는 무책임한 엄마가 증오할 만큼 밉기도 했다가 , 엄마를 때리고 살림을 부수는 아빠를 혐오하다가도 , 끝없는 빚의 반복에 질리게 만드는 엄마와 사는 아빠 인생이 한없이 짠하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 7살이나 되었을까, 나는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와 잠을 잤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니 등 돌아 자는 척하면서 생생히 들었다.

엄니, 이것 보쑈, 흑흑흑…

엄마가 또 집을 나가면서 동전 넣어놓는 저금통에 동전은 다 빼가고 그 안에 자갈돌들로 채워 놓은 것을 아버지가 발견한 것이다. 돈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 돈을 다 빼가고 돌로 채워 놓았던 것이다. 어릴 땐 이런 내 가정환경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밝은 척을 했고, 친구에게는 행복한 가정인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그리고 또 내가 두 번째 아버지 우는 모습을 본 것은 내 결혼식날 아침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런 가정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부자가 되고 싶었고, 빨리 집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결혼이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1살 12월,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에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아버지는 처음 에는 임신이라도 한 거냐 화를 내시더니 , 막상 어린 딸 시집보내는 전날에는 많이 우셨는지, 퉁퉁 붓고 벌게진 눈으로 밤새 철없이 찜질방에서 친구들과 놀고 온 나를 보며 밤새 한 잠도 못 잤다 하시며 울먹이셨다…

엄마가 집을 나간 지 오래라 엄마 대신 큰언니가 어린 동생 결혼준비를 도왔고, 아버지 동생 부인 그러니까

작은 엄마가 내 결혼식 엄마자리를 대신 앉으셨다.

엄마는 결혼 한참 후 추운 겨울에 갑작스럽게 내 신혼집을 찾아왔다. 내 가 우리 아들을 막 낳아 백일이나 되었을까.. 결혼 4년 만에 친정 엄마는 어디 시장에서 사셨는지 빨간 무늬가 들어간 싸구려 밥그릇, 국그릇, 접시들을 잔뜩 보자기에 싸서 들고 우리 신혼집을 찾아오셨다.

그때부터 16평 빌라 신혼집에 엄마와 같이 한 1년인가를 살았을까… 엄마는 또다시 윗집 아랫집에 우리 손주가 아파 급하게 병원을 가야 하는데 돈이 없다느니,

딸이 대학병원 간호사이니 곧 돈 갚을 것이니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대기 시작했다. 또 그달 빌라 동 반장으로 내가 걷어 놓은 관리비 모아

놓은 것을 엄마가 몰래 다 빼간 것을 알고,

엄청 눈이 내리는 날, 나는 울며 불며 엄마를 엄동설한에 내쫓았다 , 독한 말을 해대며 , 내가 막 시작한 내

가정까지 망칠까 무서워 몸서리를 치면서 매몰차게 엄마를 내쳤다.

그러고서는 몇 년이나 지났을까..

엄마가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해 의식 없이 계신다는 언니의 연락에 부랴부랴 기독병원에 내려갔을 때다.

내가 엄마하고 부르자, 의식 없던 엄마가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나는 그때 중환자실에서 나와 대기실에서 등을 들썩이며 울었다.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울자 영문을 모르는 간호사는 그때 나에게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니니 진정하라고 했다..

일주일인가 후에 엄마는 고요히 평안한 얼굴로 돌아가셨고, 오히려 나도 돌아가신 날에는 엄마 차라리 천국에서 웃는 모습으로 봬요 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보내 드린 거 같다.. 아버지는 결국 엄마 장례식레 나타나지 않으셨다. 우리 네 형제들에게 그저 미안하다고만 하시고는..


또 나는 친정아버지의 세 번째 뜨거운 눈물을 보았다. 잘 살고 있으리라 믿었던 셋째 딸이 어느 날 까치머리를 하고 기도원에 내려와 기도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헐레벌떡 나를 보러 오셔서는 기도원 중턱 언덕에 주저앉아 꺼이꺼이 소리를 내며 우셨다. 니가 왜 여기 있냐 … 하시면서. 그때 나는 오히려 담담하게 아버지에게 괜찮다고 기도 마치고 내려 갈거라 위로를 했던 거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미국 이민으로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날, 아버지는 또 술 한잔 드셔서는 나에게 전화를 하고서는 또 꺼이꺼이 우시는 거다… 언제 또 와서 보겠냐… 나 죽으면 장례식에나 올 거냐? 하시면서 또 한참을 우셨다..


미국 온 지 5년째 되었을까 , 나는 집도 샀고, 이제 어느 정도 안정 되었으니 이제 친정아버지 한번 미국에 모셔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같이 동거 중인 아줌마가 아버지 지병인 당뇨와 간경화가 좀 더 심해지자 그만 같이 살고 요양병원 보내겠다 했다는 얘길 언니한테 듣고 그 아줌마 보라는 듯이 아버지만 미국 구경시켜 드려야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그 아줌마를 끝까지 새어머니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엄마에 대한 최소한의 내 예의 같아서 나는 늘 그저 아줌마라 불렀다.

셋째 딸이 진짜 비행기 한번 태워 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실 돈이 여유가 없었지만 퇴직연금에서 만불을 빌려서라도 아버지를 위한 여행계획을 자세히 세웠다..

아버지는 신이 나서 생애 처음으로 양복 입고 여권 사진도 찍으시고 잔뜩 기대를 하셨다.

그러더니, 발에 염증이 생겨 입원하셨던 게, 간경화가 심해지면서 간문맥 고혈압이 오고 혈변을 보시더니, 한참 코로나로 온세계가 대혼란이었을 때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셨다. 아버지가 오늘내일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한국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저 카카오톡 영상통화로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 아버지를 꺼이꺼이 울며 부르며 아버지 마지막 모습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미안하고 사랑합니다라고 입 밖으로 내뱉어 본 거 같다.


인천 공항에 도착해 코로나 검역관에게 아버지 발인이라도 봐야 한다고 울며 사정하여 서둘러 절차를 마치고 4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공항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간신히 큰 형부가 발인을 하루를 미뤄주셔서 이미 관속에 다 발인 준비가 되어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뵈었다.. 돌아가신 엄마처럼 평안해 보이셨다.

아버지 저 이제야 왔어요 …

언니와 형부 얘기로는 미국에서 오는 막내딸을 보고 가시려고 한참을 숨을 못 끊고 버티다 가셨다 하셨다.

미국 가실 생각에 멋지게 양복 입고 찍으신 여권 사진은 결국 아버지 영정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다행히 아버지 살아계실 때 큰 형부께서 아버지 혹시 나중에 돌아가시면 엄마랑 합장으로 하시면 어떠냐고 천국 가서는 다시 부부로 만나 웃는 얼굴로 만나시라고 여쭈었더니 흔쾌히 좋다 하셔 두 분은 돌아가신 후 다시 부부로 한 곳에 묻혀 계신다 …


우리 인생이 참 나그네와 같고 순간임을 너무나 잘 안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계획하고 준비한다지만 내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한분 하나님이심을 오늘도 믿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겸손히 나아간다.

사랑하는 아버지, 엄마 천국에서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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