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성공과 실패, 기준선
사람마다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시기가 다르듯 피워내는 꽃의 종류도 다릅니다. 서로가 피워내는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여겨져야 마땅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내가 남보다 초라하게 여겨지기도, 우월하다 여겨집니다. 왜 그렇게 내 삶의 값어치가 요동치는 건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누구보다 낫다/못하다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선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 기준선 이상이면 나은 것이고 기준선 이하이면 못하다 여겨지니까요.
경북 성주의 어떤 한옥마을을 방문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떤 한옥집의 아침식사를 꼭 먹어보라는 지인의 말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70이 훨씬 넘은 할머님께서 말 그대로 집밥을 차려주셨습니다. 찬이 부족할까 맛이 없을까 계속 걱정하시며 저희 상을 확인하셨고, 사이사이 장성한 아들딸 자랑, 손녀들 자랑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옆에 앉아 생선 가시도 발라주시고, 호박잎도 얹어주시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시는데 단어 하나하나가 제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는 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뵙는 아주아주 연로하신 할머님. 1시간 남짓 차려주신 밥상 먹은 게 다인데 '살다가 힘든 일 있으면 할머니 찾아와서 할머니 품에 안겨 울고 싶다. 그러면 다 괜찮아질 것 같다.'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며 다음에 우리 여기 꼭 다시 오자 말하더군요. 평생을 농사만 지으시고 동네 밖에 별로 나가보지도 않으셨던 할머니. 지금은 얼굴과 손에 주름 가득하고 허리도 잘 펴지지 않는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의 삶은, 할머니가 피워낸 꽃은 너무나 귀하고 고왔습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심어놓아 나를 옭아매었던 기준선 따위는 눈곱만큼도 필요 없는 할머니의 삶이었습니다.
일제 시대, 6.25와 같이 나라가 어려웠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분들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 민족’ ‘전 국민’ 같은 집합 명사에 포함되는 걸로 끝이었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태어나서 배불리 밥 한 끼 먹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전쟁통에 글씨 한 자 못 배우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분들의 삶이 실패했다, 무의미했다 말할 수 있을까요? 나라도 잃은 민족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분명 그분들이 피워낸 꽃은 그 어떤 꽃보다 화려합니다.
내 안에 세워진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그 기준선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기준선은 내가 살아오는 동안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것은 아닌가 질문해봅니다. 적어도 나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만큼은 나 스스로 검토해보고 인정한 기준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나의 삶에 대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듯합니다.
그리고…
내가 피워낼 수 있은 꽃을 피우기 위해 정성스레 내 삶을 가꾸어나가려 합니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야.”라는 어린 왕자의 말처럼 나의 꽃을 피우기 위해 정성을 다 한다면 내가 피워낸 꽃은 다른 사람의 꽃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가장 소중한 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