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레 나의 삶을 마주하기

Part 10: 수능...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

by 바람꽃

95년도에 치렀던 수능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수능 날에는 출근시간도 조정되고, 듣기 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도 금지되는 날. 전국이 긴장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날. 2020년인 지금도 비슷한 듯합니다. 대학 진학을 시작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나갈 한국인이라면 수능은 일생일대의 커다란 사건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나의 고등학교 생활이었습니다. 지금 하라면 다시는 못할 그런 생활.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가 아는 모든 고3은 (그래 봤자 나의 학교 애들이겠죠?) 누구나 하는 생활이었기에 그냥 했었나 봅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되어서 밤 11:30이 되어야 끝나는 학교. 그 후에는 학원 셔틀이 기다리고 있었고, 집에 돌아오면 새벽 2:30. 입은 옷 그대로 뻗어 자다가 그냥 그 채로 아침 6시 조금 넘어 학교 등교하던 날도 많았습니다.


수능 전 날, 불안감을 없애보겠다고 틀었던 음악이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캐럴 앨범. 어쩌면 그리 무지했을까요? 잔잔한 클래식을 들었어야 했는데… 수능 시험 당일, 크리스마스 캐럴의 요란 법석한 멜로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문제를 풀 수가 없었고, 듣기 평가는 아예 듣지도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런 나를 붙든 건 단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여기 박차고 나가면 100% 재수해야 한다.’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재수해야 한다고 강요하면 월북하겠다며 절대 재수는 못한다고 못을 박아놨을 만큼 나에게 재수는 옵션이 아니었습니다. 재수는 없다는 신념 하나로 마지막 교시까지 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가채점을 했더니 역시나… 200점 만점이었을 때였는데 평상시 점수보다 20점이 낮아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평소보다 점수가 훨씬 더 잘 나와 특차로 넣겠다며 본고사를 바로 접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나왔던 점수가 나왔기에 하던 대로 본고사 준비 시작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요.


성적표가 배부된 날, 18살짜리 여고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혼자 학교 근처 소주방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학교에 돌아와 담임선생님과 혀 꼬인 채로 상담을 했습니다. 평상시였다면 있을 수도 없는, 퇴학 처리될 그런 상황이었고, 그 선생님은 아마 걷지 못할 때까지 나를 두들겨 팼을 텐데 (90년대는 체벌이 너무나 당연하던 때라), 그 날은 ‘어떡하냐…’하며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번째 실패를 겪었습니다. 졸업하는 날까지 스트레스로 인해 15kg이 빠졌으니까 나름 꽤 마음고생했나 봅니다.


수능의 트라우마는, 정확히 말하면 객관식에 대한 공포감은 상당히 오래갔습니다. 15년이 지나 박사과정에 있을 때 객관식 시험을 보는 중간고사가 딱 한 과목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집 왔는데 아무래도 다 틀린 것 같아서 숨이 쉬어지지가 않아 교수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간략히 한국의 입시제도와 수능의 특별함, 그리고 나의 수능 관련된 에피소드를 말씀드렸지요. 교수님이 고개를 갸우뚱하시더니 “잠깐만… 좀 이상해서…”하며 시험지를 확인하셨습니다. “너만 다 맞았어. 네가 제일 잘 봤는데? 아무래도 넌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긴 것 같아. 그 이슈를 놓고 상담을 꼭 받아봐.” 정말 징글징글하게 수능의 후유증은 날 괴롭혔습니다.


살면서 생각했던 대로 나의 삶이 잘 안 풀릴 때면 나의 부정적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과거를 거슬러가고, 그 종착지는 늘 수능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의수능 때 늘 받았던 점수만 받았더라면… 그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말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질문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what if~ 만약 OOO 했다면”입니다. 나의 과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계획대로 된다면 이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게요?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 했는데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주변의 영향을 받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난 그냥 학교랑 학원에 간 것뿐인데 코로나에 감염됩니다.

교통신호 지키며 잘 서있는 나를 자동차가 치고 갑니다.

시험장에서 갑자기 내 앞의 학생이 기절하며 119에 실려가는 바람에 나머지 시험을 제대로 치지 못합니다.

난 그냥 태어났을 뿐인데 태어나보니 난민촌입니다.

크고 작은 별의별 일들이 가득한 곳이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정성스레 내 삶에 임했다면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이 열립니다. 내가 전부라고 생각해왔던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새로운 옵션들을 고려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내 삶의 판이 뒤바뀔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수능, 한국 사회에서는 꽤 큰 사건입니다.

하지만 수능 점수 하나에 나의 삶을 담기에는 나의 삶이 너무나 크답니다.

수능 점수 하나로 나의 삶을 평가하기에는 아직 남아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답니다.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면 축하합니다.

꿈꾸었던 미래를 향해 안정적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계속해서 나아가세요.

실망스러운 점수를 받게 된다면 그 역시 축하합니다.

여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계획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참, 머리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제 잘 듣고 있습니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그 캐럴을 아이들과 함께 들으며 “이 캐럴 덕분에 엄마는 너희를 만날 수 있게 된 건지도 몰라~”라 말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성스레 나의 삶을 마주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