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레 나의 삶을 마주하기

Part 11: 고마운 분들

by 바람꽃

“세상이 아무리 흉흉해지고 나쁜 뉴스만 들려와도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훨씬 많기에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아주 오래전에 아빠가 해주신 말씀입니다.


엄마에게 정말 고마운 점은 엄마는 나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아빠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아빠는 제조업에 계셨고 80년대 제조업은 한 달에 하루만 쉬는 날이었습니다. 새벽 6시 출근. 밤 12시 퇴근. 아빠가 정말 보고 싶으면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 즈음까지 눈 비비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린이날도 늘 “엄마한테 갖고 싶은 장난감 사달라고 해” 말씀하시면서 엄마한테 현찰 쥐어주고는 출근해야만 했던 아빠. 커서 생각해보니 아빠랑 보낸 시간이, 아니 아빠를 본 시간이 정말 적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나는 아빠랑 너무 친하다 생각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잠깐 아빠를 봐도 어색하기는커녕 늘 아빠 팔베개를 했고, 아빠한테 안겼고, 아빠한테 쫑알쫑알 댔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백 퍼센트 엄마의 공입니다. 엄마는 거의 매일 나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빠는 너희를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셔. 너희들 위해서 매일 일하시는 거야.” 뭐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이였던 나는 엄마를 통해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해주었는지. 내가 아내와 엄마가 되어 엄마의 결혼생활을 바라보니 엄마가 늘 편안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내, 며느리, 딸의 역할을 감당하며 생기는 부정적인 것들과 엄마의 역할을 분리시켜 주었습니다. 아내의 관점에서 겪는 어려움을 자녀에게 전달하지 않았던 엄마 덕분에 어린 나는 아빠와의 관계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그 선물을 지금은 내 아이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더라도 그건 나와 남편의 문제이기에 자녀들에게는 전달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고마워요, 엄마. 엄마 덕분에 난 엄마의 입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나와 아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어요.")


집 앞 길 건너에 정육점이 있습니다. 이곳에 살게 된 지 6년이 되어가는데 단 한 번도 가게를 정해진 휴무일 외에는 닫은 적이 없습니다. 단 하루도 9시 개점, 밤 10시 폐점 시각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모든 손님의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외우고 있기에 적립은 알아서 해주십니다. 딱 한번 친정엄마와 함께 가게를 들린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친정엄마가 정육점에 들리면 사장님은 알아서 제 핸드폰 뒷번호로 적립은 물론이고 “방금 전에 따님 집에 들어가셨어요.” 알려주신답니다. 그 말은 곧 사장님은 가게 앞에 주차된 제 차번호까지도 놓치지 않았다는 걸 뜻하겠지요. 그런 사장님 덕분에 퇴근이 늦은 날 내비게이션에 9:55분 집 도착 예정으로 찍혀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9:58에 가도 여전히 고기를 살 수 있으니까요. 이런 가게가 내 집 근처에 있다는 작은 사실이 내가 사는 동네에 정이 가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삶에 안정감을 줍니다. 이런 생각까지 든다는 게 참 이상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리 동네에 만능 수리공이 계십니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을 고치실 수 있는 대단한 분입니다. 한 번은 빌트인 되어 있는 식기세척기가 고장이 났습니다. 세척기 문이 안 닫히는 바람에 포장 테이프로 임시고정을 해놨습니다. 식기세척기 제조회사에서도 이미 단종된 모델이라 고쳐줄 방법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사장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처음으로 고민을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도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며 다음에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도구를 가지고 방문해주셨지만 또 불발. 일주일 후에 다시 와주셨습니다. 여전히 안 고쳐졌습니다.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가셨습니다. 2주일이 되도록 연락이 없으셔서 ‘아, 시간은 많이 소비되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안 해주시려나보다’ 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있는 즈음에 전화를 주셨습니다. “고객님, 너무 늦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계속 고민해봤는데 방법을 찾았습니다. 내일 방문드려도 될까요?” 다음날 와주신 사장님은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주고 가셨습니다. 그냥 “못합니다”하고 관두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한 달여 동안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면서 결국에는 해결해내신 사장님. 그분 덕분에 집에 있는 어떤 물건이나 제품이 고장 나도 걱정이 안 됩니다. 사장님의 일정이 늘 빡빡한걸 보니 나 같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 많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쓰다 보니 이런 분들이 나의 주변에 너무나 많네요. 여기서 멈추어야겠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역사책에서 읽기만 했던 그런 한 해를 보냈습니다. 바이러스 하나로 전 세계가 이렇게 한순간에 맥없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총탄 하나 미사일 하나 사용하지 않고도 전 세계가 완전히 스탑 되는 걸 보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나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정성스레 해 내는 것.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주시는 수많은 분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편안하게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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