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14살이 된 작년에 사준 책이지만, 15살에야 펼치게 된 <14살에 시작하는 처음 심리학>.
책을 펼쳐 보기 전에는 내가 대학원에서 배우는 내용들을 쉽게 설명한 내용일 거라 생각했다. 책을 펼쳐 보니 아이들이 흥미 있어 할만한 주제들을 선택적으로 골라 놓은 느낌이다. 다행히 저자의 의도는 명중. 아들은 꽤나 관심을 가진다.
나와 아들이 특별한 준비 없이도 리추얼처럼 이 시간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은,책을 함께 "낭독"하는 것이다. 낭독을 하면 나도, 아들도 미리 읽을 필요가 없다. 문학이든, 비문학이든 한 단락 또는 한 장씩 교대로 소리내어 책을 읽다 보면 상대방의 생각이나 느낌이 흘러가는 속도를 느낄 수 있다. 집중하는 문구에는 감정을 실어 천천히 읽고, 관심 없는 문구에는 휘리릭 바람이 지나가듯 빨리 읽는다. 다행히 이 책은 아들이 감정을 실어 책을 천천히 읽는다. 그러면 나는 '얘가 재밌나보구나~' 하고 기분 좋게 책에 집중한다.
오늘의 주제는 "착각". 착각에는 주의력 착각, 자신감 착각, 기억력 착각, 닻 내리기 효과가 있는데, 시간 관계상 주의력 착각과 자신감 착각에 대한 부분만 읽고 대화를 나눴다. 책은 심리학 주제와 관련된 재밌는 영상과 영화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중학생 아이들이 겪는 일상의 에피소드가 나오고 상담소 선생님들과 함께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의력 착각"에 나온 영상은 심리학이나 교육학계에서는 이미 너무 유명한 '고릴라 영상'.
(※이 내용이 궁금한 이웃님들은 아이들 공 주고 받는 게 끝나면 잠시 영상을 일시정지하신 후, 답을 생각해 본 뒤에 답을 확인해 주세요. 스포일러 주의가 꼭 필요합니다!!!)
아들은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 번 패스 했는지 잘 맞혔다(나는 이것도 틀렸다). 그렇지만 "고릴라를 봤니?"라고 물으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다 ㅋㅋ. (아들 이해해~ 엄마도 못 봤어). 이 영상에는 뜬금포 "고릴라"가 등장한다. 여유 있게 등장해서는 한 가운데에서 나 보란듯 가슴을 두드린 후 유유히 퇴장한다. 그럼에도 아들과 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도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주의력 착각"의 일종으로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보지 못한다는 뜻으로, "무주의 맹시"라고도 한단다. 무주의 맹시는 주변의 다른 것들, 특히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할 때 많이 일어난다.농구장에 고릴라가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의외로 깜놀하는 표정이다.
아들: "두 눈을 뜨고도 못봤네요. 그럴 수가 있네요...신기하다"
나: "너도 이렇게 착각할 때가 있어?"
아들: "음... 있는 거 같아요 (사실 무지 많다. 아들은 한 가지에 꽂히면 옆에서 북치고 장구를 쳐도 모를 스타일이다)"
나: (있는 게 아니라 무지 많다고 지적해고픈 욕구를 꾹 누르며) 맞아. 엄마는 사실 착각할 때가 많은 거 같아. 이걸 보니 최근에 너랑 한강공원에 가서 겨울눈을 찾았을 때가 생각나네. 엄마는 예전엔 자연이 변화하는 모습에 관심이 없었거든. 근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구. 너랑 한강공원에 가서 겨울눈이 어딨는지 많이 찾고 싶어 했잖아. 처음에는 아무리 봐도 잘 안보였는데 있을 거라고 믿고 자세히 보니 이미 겨울눈은 많이 나와 있더라구!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으니까 안 보였던 것 뿐이었어. 기대나 관심이 없으면 눈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참 많은 것 같아.
2월 초 한강공원에서 찍은 겨울눈들
이 영상에서 우리가 놓친 건 고릴라만이 아니었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검정 옷을 입은 여자가 중간에 퇴장했고, 뒤에 있는 커텐도 빨간색에서 주황색으로 색깔 톤이 점점 옅어진다. 나는 하나도 맞춘 게 없었다...ㅠㅠ 착각이 심한가 보다. 아들은 그래도 커튼의 변화는 알아맞췄다(여담이지만 눈썰미 좋은 딸내미는 패스 수를 빼곤 다 알아맞췄다). 이처럼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은 '변화 맹시'라고 한다. 눈 뜨고도 코 배인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다.
2번째 착각은 자신감 착각. 가수가 꿈이지만 노래를 못하는 카수 씨는 자신감 하나는 끝내준다. 카수 씨에게 상담쌤들은 '더닝-크루거 효과'를 말해준다. 1999년 코텔 대학교 사회심리학 교수 데이비드 더닝과 그의 제자 저스틴 크로거가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인데,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고 자신의 점수가 몇 등일지 예상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점수가 낮은 학생일수록 자기 등수를 높게 예상하고, 유능한 학생일수록 자기 등수를 낮게 예상했다고 한다. 무능한 사람일수록 자신감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라고.
대화를 나눈 후 아들의 글 (허락 받고 올립니다 ㅋ)
이 실험 결과를 들으니 하인츠 코헛이 말하는 '과대 자기'가 생각났다. 그는 사람이 어렸을 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발달시켰어야 할 '건강한 자기애'를 형성하지 못하면 그 아이는 자신의 전능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과대하게 포장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어린 아이에게 남아 있다가 서서히 없어져야 할 '고태적 과대 자기'가 계속 남아 있으면 이상은 높으나 자신의 현실적 능력과는 괴리가 매우 큰 상태로 살명서 고통 받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간극의 긴장을 견딜만한 자아의 힘이 약하면 심리적 고통에 휩싸이고, 그 고통을 극복해 보려 하는 노력은 심리적 '증상'으로 나타난다. 아들과도 앞으로 진정한 자신감이 무엇인지 기회가 될 때마다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아들은 오늘 나름대로 깨닫는 게 많아 보이는 듯 했다. 아들은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고, 나 역시도 나의 착각을 깨달았다.
봄을 준비하며 나와 있는 수많은 겨울눈들을 보며, 아들에게도 이미 나와 있는 수많은 겨울눈을 못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나도 아들에 대한 무주의 맹시, 변화 맹시를 줄이고 싶다. 두 눈을 더 크게 떠야겠다. 그리고 그 눈은 믿음과 기대로 가득찬 눈이길!
p.s.: 2월에 서랍 안에 넣어둔 글을 꺼냈는데 봄이 되었다. 그 때 관찰한 겨울눈들에서 잎이 나오고 꽃이 피었다. 아들의 잎도, 꽃도 열심히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