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의 울음소리 그리고 아들의 울음소리

(feat. 김선우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by 지음

학기가 시작되고 바빠진 아들과 모자북클럽을 할 시간이 부족해졌다. 학원을 쉬어 가는 오늘, 비로소 틈이 생겼다. 오늘의 책은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아들은 수필 작품 중 『자유를 향한 질주』와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을 골랐다. 중2 아들이 이런 시간을 함께 가져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책이나 읽을 자료는 전적으로 아들의 선택에 맡긴다. 『자유를 향한 질주』는 영화 <스피릿>에 대한 리뷰처럼 구성되어 있어 영화를 봐야 더 재밌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포스팅에서는 우선 패쓰.


아들의 2번째 pick 김선우 님의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은 2페이지의 짧은 글임에도 마음에 울림이 많았다. 지렁이에게도 울음소리가 있다니! 도시에서 태어나 쭉 도시에서 자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얘기였다. 작가의 비유적 표현이겠거니 했지만 진짜로 지렁이에게도 울음소리가 있단다.


"유기농 퇴비를 만드는 곳에 간 적이 있습니다.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죠. 비닐하우스 가득 놓인 항아리들 속에서 지렁이들이 퇴비를 만들고 있었지요. 발소리를 죽이고 귀를 세워 보았습니다. 청각이 예민한 지렁이들이 인기척을 알아채고 조용해지기 전까지, 눈 깜짝할 사이나마 지렁이 울음소리를 듣는 바로 그 순간, 농부는 자신이 우주를 여행하는 여행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김선우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이 글귀를 읽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진다. 사실...난 지렁이를 싫어한다. 무서워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대학생 때도 비가 오면 지렁이들이 출몰하는 교정을 걸으며 지렁이를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45도 아래로 걸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나도 3년 전 한달 간의 제주살이를 통해 자연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바뀌었다. 대학원에 들어가기 전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내려간 제주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새별오름에 올라서 바라본 제주의 초록은 아직도 내 마음에 선명하다. 그 곳에서 아이들과 땡볕에도 바닷가 바위 틈의 게를 잡으려 3~4시간을 돌아다닌 일, 낚시라는 게 이렇게 모든 세상 만사를 잊을 정도로 몰입이 잘 되는 일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모든 게 좋았지만...낚시를 하며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지렁이 미끼를 끼우는 일이었다. 평일에도 낚시를 하길 원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절대 지렁이를 만질 수 없으니 아빠가 오늘 주말을 기다리자고 했다. 아빠가 온 주말, 드디어 낚시를 하러 갔지만 내가 지렁이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남편은 지렁이를 뚝 잘라서 낚시바늘에 끼우고 있었다......할말하않......문제는 낚시가 너무 재미있었다는 거다. 좀 더 많이 잡아보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렸지만 나는 지렁이를 못 만지는 여자였다. 낚시 도구 만지랴 낚은 물고기 건지랴 바쁜 아빠가 지렁이 끼우는 게 더뎌 보였는지, 딸아이가 갑자기 지렁이를 뚝뚝 잘라 끼우기 시작한다. 나처럼 겁쟁이라 믿었던 아들도. 결국은 나도 장갑 2개를 끼고 지렁이 끼우기에 동참해야만 했다. 그 날은, 나의 지렁이 공포증을 극복한 감격적(?)이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글을 읽으니 그 때 지렁이들이 얼마나 큰 울음소리를 냈을지 무척 미안해졌다(난 채식주의자도 아닌데). 그리고 문득 지렁이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내고 있는 울음소리에 너무 둔감해진 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아들도 그런 느낌을 받았나보다. 낚시 얘기를 하며 아들도 불쌍한 표정을 함께 짓는다(귀여운 녀석). 그리고 대화는 이어졌다.


아들: 지렁이 울음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예요?

나: 그러게. 음...울음소리가 컸다면 우리가 낚시 미끼를 끼울 때 울음소리가 어마어마했을텐데. 우린 하나도 못 들었잖아. 그러니 소리가 진짜 작은가봐. 글 속 농부는 숨을 죽이고 귀를 세워 본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까.

아들: 그러네요. 그럼 주변이 엄청 조용해야겠네요...

나: 그렇겠다....아들, 넌 누군가 너의 얘기를 이 정도로 귀 기울여 듣고 있다고 느껴 본 적 있니?

아들: 음.....그 때 엄마가 그랬잖아요.

나: 응? 나? 언제? (내심 기대)

아들: 그 때 동생이 저보다 더 잘 살 것 같다고, 더 공부도 잘할 것 같고, 부자로 살 것 같다고 그랬을 때...그 때 엄마가 제 소리를 들어주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나: ........


그래. 작년이었지. 도통 자신의 감정을 잘 얘기하지 않는 아들에겐 참 특별한 일이었다. 가족이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있는데 잘 져주지 않는 아빠가 끝내 이기려는 순간 딸은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 딸바보인 아빠는 딸이 이기도록 한수를 접었다. 얼떨결에 지게 된 아들은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아들 엄마는 꼴등했잖아 너는 3등 했으니 엄마보다 낫잖어~~"하며 대충 위로했다. 근데 설겆이를 하러 가는 나를 아들이 뒤쫓아왔다.


"엄마, 사실 저는 동생이 저보다 잘 살 것 같아요. 저보다 더 부자로 살 것 같고, 공부도 더 잘하고, 더 좋은 사람하고 결혼하고 그럴 것 같아요." 하고 씩씩대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보는 아들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아들의 감정과 마주한 이 순간이 나는 내심 반가웠다. 함께 자리에 앉아 차분하게 아들의 말을 들었다. 항상 동생을 예뻐하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아들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빠릿빠릿한 동생에게 늘 양보한 아들은 내내 속상했었나보다. 매번 해사한 웃음으로 동생의 짖꿎음을 넘겼던 아들은 아마 조금씩 속으로 울고 있었나보다. 그 때 아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깊은 속에 있던 열등감들을 꺼내 보였다. 이 아이가 이렇게 말을 잘했나 싶을 정도로 속말을 우르르 꺼내 놓았다.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알 수 있었다(상담을 배워 참 다행이다). "아들, 엄마는 너의 진짜 얘기를 들을 수 있어 반갑다.. 반갑다는 얘기가 너한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엄마는 진짜 너를 만난 것 같아...그리고 참 미안해.. 네가 이렇게 오랫 동안 속상했는지 몰랐네. 몰라줘서 정말 미안해...그래도 지금이라도 알려 줘서 정말 고맙다." 아들의 진짜 감정을 늘 알고 싶었던 나는 그 아이와 그 순간 그렇게 접촉했다. 딸아이도, 아빠도 아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아들의 감정에 공감했고 미안함을 전했던 그 날.


내 인생 항로를 바꾸게 해준 소중한 아들에게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나만 그렇게 기억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들에게도 그 경험이 엄마가 자신의 소리를 들어준 시간이었다는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벅찼다. 책은 참 고맙다. 이런 얘기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니 말이다.


"누군가 자신의 고민과 상처를 이야기하다 울음을 터뜨렸다면, 그 사람은 괜찮은 거예요. 운다는 건 상처를 극복할 힘이 있다는 거지요. 유마(석가의 제자)의 말을 빌려야겠네요. 세상이 죄다 병들었는데 나만 희희낙락할 수는 없는 거라고요. 다 아픈데 나만 안 아플 수는 없는 겁니다. 목숨이 있는 존재란 누군가에게 기대어 존재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울음은 웃음만큼이나 소중한 겁니다. 울음은 자기를 비워 내는 강력한 몸의 말이지요."

-김선우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세상>-


아들은 그 때 울음으로 자기를 비워냈다.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아마 난 아들의 울음소리를 놓쳤을 때가 더 많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세상엔 우리가 듣지 못하는 지렁이들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많을까. 이런 비유가 지나치지 않을까 순간 생각했지만 박완서 선생님은 이미 <지렁이 울음소리>라는 단편을 쓰시기도 했다. 창비에서도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봐!>라는 책이 나왔을 정도이니 지나친 비유가 아니다.


그러니 발소리를 죽이고 귀를 세워 보자. 내가 들어야 할 지렁이들의 울음소리가 없는지...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마 우주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선우 지음
박완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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