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음 May 17. 2021

이토록 사려 깊은 만화책이라니

(feat. 종가시나무: 마스다미리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작가 하지현의 <정신과 의사의 서재>는 보물창고였다. 내게 부족했던 우뇌와 쾌락중추 자극을 위해 주말부터 시도하고 있는 여러 책이 정말이지 다 좋다. 첫 부분만 봐도 찌릿한 느낌이 오는 책들. 그중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는 무게감 있는 대사들을 내 마음에 묵직하게 각인시켰다. 남편도 슬쩍 이 책을 구경하다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다.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지만 지금 떠나가고 있는 봄을 추억하며, 한 가지 에피소드를 나누고 싶다.




어린 시절 꿈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주요 등장인물은 40살이 된 엄마, 유치원생 딸, 엄마가 집을 비울 때 딸(조카)을 돌봐주는 미혼 고모 세 사람이다. 중년에 들어선 엄마도, 미혼인 고모도, 유치원생 딸도 각자 인생의 의미를 찾아간다(유치원생 딸이 비현실적으로 어른스럽긴 하다). 조카는 고모에게 묻는다. 고모는 무슨 일을 하냐고. 고모는 일반 사무직에 다닌다고 대답한다. 조카는 다시 묻는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인지. 고모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어하는 일도 아니라고 담담히 말한다. 금 하는 일은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일이라는 그녀의 말속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베어 있다.


조카는 다시 묻는다. 고모는 어린 시절 꿈이 뭐였냐고. 아주 어린 시절에는 꽃집, 빵집 주인, 가수.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 중학교 때는 소프트볼 선수.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된 여정을 조카에게 들려준다. 이어지는 이야기...


마스다 미리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일본 책이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습니다.


고모의 삶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를 배운다. 어린 시절 가졌던 꿈을 뒤로하고, 그 상실의 아픔들을 지나 현재 삶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람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크면 심리적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고모의 말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혜로운 고모의 태도에서 어린 조카도 무언가를 느낀 걸까.




종가시나무와 벚꽃나무


고모와 조카의 어린 시절 꿈 얘기를 나누기 전, 고모와 길을 가던 조카는 집 주변을 둘러싼 작은 나무 울타리를 다듬는 정원사 아저씨를 발견한다. "작은 나무네~"라고 조카가 말하자 아저씨는 "그렇게 보이지? 하지만 작은 나무가 아니란다. 종가시나무라고 하는데 10미터가 넘는 큰 나무지~"라고 답한다. 고모의 얘기를 잠잠히 듣고 있던 조카는 생각한다. 고모는 종가시나무 같다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주세요 ^^


요즘은 예전엔 1도 관심 없던 나무에 자꾸 눈이 간다. 겨울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겨울눈들도 발견하고, 그 겨울눈들에서 이제 잎이 나오고 꽃이 피는 과정이 이제서야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비슷하게 생긴 줄만 알았던 나무들의 모양이 이토록 다르다는 걸 보게 되면서 나도 생각해 봤다. 


나는 어떤 나무를 닮았을까.


어린 시절에는 분명 벚꽃나무가 되길 바랐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는 예쁜 벚꽃나무. 꽃이 피는 것도, 지는 것도 예쁜 벚꽃나무. 내 아이들은 꽃이 빨리 피는 나무가 되길 바랐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아이들로 크길 내심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살다 보니 나는 벚꽃나무가 아니었고, 아이들도 꽃이 빨리 피는 나무는 아닌 것 같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때 처음에는 아프고 우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내 옆의 다른 나무들이 보였다. 벚꽃나무만 예쁜 게 아니었다. 별다른 꽃을 피우지 않는 소나무도 운치 있고, 길에 평범하게 줄지어 있는 가로수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나무는 키가 아담해서 예쁘고, 키가 커서 기댈 만하고. 덩치가 커서 듬직하고 호리해서 지켜주고 싶고. 그러다 보니 내가 꼭 벚꽃나무가 아니어도 되는구나 싶었다.


사실은 큰 나무이지만 기꺼이 작은 나무가 되어 삶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종가시나무. 이 멋진 메타포를 마음에 담으니 내 주변의 종가시나무 같은 사람들이 보인다. 큰 나무이지만 기꺼이 작은 나무가 되어 울타리가 되어 준 사람들. 그리고 나도 가족들에게, 그 누군가에게 그런 종가시나무 같은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너른 마음이 싹튼다.


30분이면 다 읽는 책이지만 이 책의 대사들은 아주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 것 같다. 마스다 미리의 다른 작품들도 계속 만나고 싶다. 이런 멋진 만화책을 소개해 주신 하지현 선생님, 감사해요! 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책을 사랑한다면 이렇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