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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Aug 08. 2022

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을까

(feat.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는 전능감, 과대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어린이들에 대한 선생님의 근사한 반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겠다며 호언장담하는 어린이, 옥스퍼드에 유학을 가게 되면 영어에 더 익숙해서 선생님과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어려울까봐 걱정하는 어린이, 국가대표 농구선수가 될꺼라는 꿈을 가진 아이가 농구를 갓 해본 선생님을 짠하게 생각하는 어린이까지. 어린이들의 귀여운 전능감과 과대감을 선생님을 참으로 귀하게 여겨 줍니다.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어린이의 허세를 기꺼이 허용해주고 어린이의 부풀리기를 성장의 선언으로 보아주는 선생님의 시선은 따뜻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을 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그 욕구가 좌절되고 꺾였을 뿐이죠. 그 욕구를 어린 시절 꿈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꿈 뿐일까요. 지금이라도 내 마음 속에 품은 그 꿈도 어린 시절 꿈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그런 나의 꿈, 자라겠다는 선언을 기꺼이 인정해 주고 멋있게 바라봐 주는 대상이 우리 인생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를 유지할 수 있어요.


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을까?


엄마가 된 지금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자주 사로잡힌다면, 그래서 우울하고 공허해질 때가 많다면 한번 돌아보세요. 나는 어린 시절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는지... 어떤 꿈을 꿨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 한 조각도 나지 않는다면 자기애적 욕구는 무의식속에 꾹꾹 억압되어 있을 수 가능성이 높아요. 


성인이 된 지금도 앞으로 더 나아가야 되는 순간,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해야 되는 순간 어린 시절 억압되었던 자기애적 욕구는 갑자기 고개를 들 수 있어요. 이런 내 욕구를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지만 그런 대상을 만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수치심과 격노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자기애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완벽해지려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결국 번아웃이 오기도 하지요. 그 욕구를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에게 투사했을 때 자녀는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기가 너무나 어려워집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알아차리는 게 필요해요. 나는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는지. 자라고 싶었지만 어디에서 좌절되었는지를. 자기(self)가 발달되었던 경로를 추적하다 보면 지금 내가 우울하고 불안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녀의 잘못으로만 화가 날 때도 있겠지만, 자녀를 통해 좌절되었던 내 모습을 보기 때문에 화가 날 때도 많다는 걸 알게 됩니다. 왜 이렇게 우울한지, 불안한지 모르겠다면 아직 의식화되어 있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답은 무의식 안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살면서 적어도 한번쯤은 어린 시절 무의식 안에 잠궈 놓은 것들을 열어보는 심리 작업이 필요합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영역이 커질수록, 우리는 무의식적 반응으로 살지 않고, 의식적 결정을 통해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이해가 필요한 실질적 이유입니다.


<마주봄 질문>

엄마가 된 '나'는 어린 시절 어디까지 자라고 싶었을까요? 

그리고 엄마가 된 지금은 어디까지 자라고 싶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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