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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s Apr 28. 2022

우리 큰아빠

2022년 4월 12일 오후 11시 47분.


큰 아빠에게 마지막 시간이 선고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게 진짜 인가 싶은 현실 착오의 혼란스러움과 혼돈의 끝에 꼬리처럼 쫓아오는 미칠 듯한 상실감을 남긴다.   



나는 큰 아빠와 같이 자랐다.


큰아빠는 뇌성마비를 가지고 태어나셔서 왼쪽 다리만 움직이실 수 있었다.

어렸을 적, 큰아빠는 왼쪽 다리만 가지고도 온 거실과 방을 누비시며 자장면도 가끔 혼자 드시고 (얼굴에 많은 자장들이 묻었지만) 온갖 책과 신문 등을 쉬도 때도 없이 읽으셨으며 가끔 내 숙제도 도와주셨다.

특히 야구를 좋아하셔서 가끔은 큰아빠 발 쪽에 테니스 공을 던지면 왼 다리를 배트처럼 쭉 치시며 공을 치시기도 했다.

어려서 큰아빠는 내게 흔히들 말하는 영웅 같았다.

오체불만족의 '오토다케 히로타다' 나  '닉 부이치치' 등의 인물들이 당시에 크게 여러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적에도 개인적으로는 큰 감흥이 없었던 건 큰아빠를 보고 자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눈앞에서 수시로 극복이란 것을 보고 자랐다.  


큰아빠와 할머니는 꼭 같이 계셨다. 할머니께서는 어디 여행 갈 일이나 나가 계실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으셨다. 가끔 나가셔도 하루가 넘지 않게는 돌아오셨다. 그러다 할머니께서 폐암으로 병원에 몇 주 입원해 계셨다 집으로 오셨을 때, 할머니께서는 들어오시자마자 큰아빠에게로 가 손을 꼭 잡고 미안하시다며 우셨다. 늘 감정 기복 없이 여유로우시고 차분하셨던 할머니셨는데 할머니의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 폐가 온전치 않으셔 쇠 소리가 나시는데도,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어 편안하게 계시다 가시라고 돌아오셨음에도. 당신의 건강과 내일이 아닌, 큰아빠에 대한 몇 주의 공백의 미안함에 굽어진 손을 붙잡고 우시는 모습에서 나는, 사랑을 봤다.

곱디 고운 우리 할머니는 평생을 큰아빠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사셨던 것 같다.

온전히 뻗어 땅을 짚고 발을 차고 스스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다리를 주지 못해

잘생긴 얼굴 구기지 않고 말을 내뱉고, 가슴팍으로 먼지 묻은 바닥을 딛으며 다니지 않아도,

평생을 가족들만 보는 게 아니라, 더 넓은 세상 더 많은 사람들 만나 더 많이 웃으며 상처도 받고 사랑도 해보고 근사한 옷도 차려입어보고 그렇게 가장 보통의. 가장 평범한 딱 하루의 날도 살게 낳아주지 못해

늘 미안하고 더 애틋하게, 더 집요하게. 큰아빠의 곁에서 큰아빠의 손과 발이 되어주셨던 것 같다.


그렇게 10여 년 전쯤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큰아빠와 계속 함께 살았다.

할머니 계실 때도 그랬지만, 아빠는 더 큰아빠를 열과 성을 다해 돌보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큰아빠는 몸도 마음도 많이 변하셨다.

몸에는 근육 강직으로 인해 더 움직이실 수 없게 되었고, 목은 무리하며 자주 써 수술을 해야 했고 결국 바닥을 떠나 침대로 올라오셨다. 내 몸 남짓한 침대가 꼭 감옥 같이 보였다. 그러면서 웃음도 많이 사라지셨고, 늘 야구만 보셨다. 다른 채널을 돌리면 버럭 화를 내셨고 류현진의 미국 진출 이후로는 새벽 4시에 무조건 TV를 틀어드려야 했다. 그러다 가끔 내뱉는 말은 '죽여줘, 죽여줘'였다.

나의 영웅이 사라지는 날들이었다.


영웅이 사라지자 한 사람이 보였다.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던 큰아빠의 모든 것들이. 큰아빠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것들이었을까.

방 한 칸 나서기도 어려운, 방 문마다 달려있는 바닥의 문 턱들이. 얼마나 거실로 나가는 것을 망설이게 했을 까.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 오고 가는 조카들의 옷차림새로 알아야만 했던 것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저 살아가야 하기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일분일초 시간이 넘어가는 것을 매 분 매 초 누운 채로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더 고집스러워지시고, 단 한 번도 채널을 넘겨주지도 않으셨고, 새벽마다 엄마 아빠 혹은 우리들을 깨워 짜증이 몰려왔던 날들도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감이었다. '죽여줘 죽여줘' 해도 가장 살아가려고 애쓰셨던 게 큰아빠였다. 가끔은 '죽여줘 죽여줘'가 '살려줘 살려줘'로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늘 옆에서 살아감을 부축인 것은 아빠였다.


아빠와 엄마는 멀리 갈 일이 생기시면 일단 큰아빠를 누가 챙겨줄 수 있을지부터 걱정하셨다.

세미나 혹은 여행 일정이 잡히시면 혹은 저녁에 늦게 들어갈 일이 생기시더래도 빈 집에 남아 큰아빠를 돌볼 사람들부터 섭외해야 했다.

특히 나나, 내 동생이 일정에 큰 지장을 끼치고 싶지 않아 하셔서 가끔은 일을 포기하기도 혹은 무리해서 집으로 오시기도 했다.

아빠는 큰아빠의 소변 문제로도 일을 보시다 들어오시기도 했고 직접 매번 힘이 없는 큰 아빠의 배변을 맨 손으로 돕고 오래 누워계시다 등에 욕창이 생길까 큰아빠의 자세들도 수시로 바꿔주셨다. 채널을 못 돌리게 하는 큰아빠와 가끔은 다투시기도 아침에 중요한 일이 있으신데 새벽에 깨워 티브이를 틀어달라는데 짜증을 내시기도 하며 큰아빠의 일과에 특별함을 더해주기도 하셨다.

엄마도 2시간을 걸려 퇴근하시고 먼저 하는 일은 큰아빠의 저녁 드리기였다. 식사가 조금이라도 늦어도 큰 아빠는 걱정해하시고 아기 같이 밥 달라 소리치셨기에 늦지 않으려고 더 빨리 걷고 저녁에 다른 일정을 거의 잡지도 않으셨다.

서로가 크게 시간이 비지 않게 집을 비우면 안 됐기에 우리 가족은 늘 집에 있는 시간 조율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억지가 아니라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큰아빠는 주로 고집 센 누워있는 노인의 형태를 띠고 계셨지만, 꼭 천사 같기도, 아기 같기도 했다.

맑고 흰 피부에 손을 굽어 올려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일생을 어떠한 욕심도, 시기심도, 식탐도, 음욕도, 나태함도 없이 사셨다.

그저 사랑으로 돌봐졌고 사랑으로 사셨다.




큰 아빠의 영정 사진 앞에는 농도 짙은 눈물들이 잔뜩 떨어졌다.


생일을 일주일도 남겨두지 않고 큰아빠는 돌아가셨다. 

장례는 무빈 소로 가족들끼리 치러졌다. 평생을 가족들 뿐이 없으셨기에, 발 넓으신 아빠도 괴로움에 지인들에게 알리지 조차 못했다. 

큰아빠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는 꽤 적은 인원들 뿐이었지만, 굉장히 짙은 농도의 눈물들이 떨어졌다.

소식을 듣고 시력을 거의 잃으셔 밤에 잘 다니시지 않는 큰 고모께서도 한 걸음에 달려와 계속 함께 계시며 눈물과 남은 가족을 다독이는 것을 번갈아 반복하셨고, 중국에 계셔 못 오시는 작은 고모도 핸드폰 영상으로 함께, 주체 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저 뚝뚝 흘리셨다. 아빠는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고 하시며 어느 무엇보다 녹진한 눈물을 떨어뜨리셨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큰아빠는 천국으로 가신다는 것을.


갑갑하고 답답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고통뿐인 그야말로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청초한 그 영은 천국으로 가 두 다리에 힘을 얻고 목소리에 생기를 얻고 두 팔에 의지를 얻어 진짜 평범한 모두들처럼 원하는 곳을 걷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을.


그러나

너무

아팠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먹먹했다. 괴롭고 주체가 안됐다. 그저 붓고 엉망이 된 얼굴로 눈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보며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더 이상 돌볼 수 없음에 괴로웠다. 더 주고 싶은 사랑이 많음에 후회됐다. 왜 나중을 바랐을까. 왜 더 잘되면을 기대했을까.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바쁜 척하며 살았을까. 모든 텅 비어진 마음에 괴로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남은 사랑들이 자꾸 온 가슴팍 늑골 어귀를 돌며 내장기관을 찔러댔다.


울음을 억지로 정리하며 아빠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젠 너희도 자유롭게 살어. 가고 싶은 데 가고, 인생 60부터 하잖아. 너희 인생 살어'라고 다독이는 큰 고모의 대답에 아빠는 한 번도 고생한 적 없다고, 이랬다면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시며 더 자책하고 아파했다. 그야말로 더 이상 돌볼 수 없음에. 60 평생을 큰아빠의 뒷바라지를 하며 본인의 삶과 잠을 포기하면서 까지 큰아빠를 돌보며 사랑을 주셨음에도. 남들은 평생 해볼 일 없을 남의 변을 받는 일을 매번 하시고 계절마다 절기마다 기분 내야 한다며 새 옷을 사 입히시고, 소화 못 시키는 큰아빠를 위해 매 끼니 음식을 가위로 난도질 쳐 부드럽게 만들어 먹이시고, 큰아빠가 행여 무슨 일이 있을까 방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두시고 나가 계실 때, 수시로 큰 아빠 상태를 핸드폰으로 보고 살피시고 밤마다 큰아빠를 닦고 이불을 덮어주시고 등등 나열하지 못한 사소한 모든 큰아빠의 삶을 다 돌보셨음에도, 그렇게 사랑을 쓰시고도 아직도 돌봐야 한다고, 더 사랑을 쏟아낼 수 있다고.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처음 가족들 앞에서 힘들다고 말씀하신 아빠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깊고 맑은 사랑을 배운다.


큰아빠가 보셨길.


얼마나 많은 사랑. 큰 사랑. 짙은 사랑을 받으며 사셨음을.

방 문 하나 나서기 어려운 삶이었지만은

누군가들에겐 너무 크나큰 존재였다는 것을.

소중했다는 것을.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며칠 뒤


태어나 처음, 집을 들어갔는데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큰아빠가 안 계시다는 것이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 모두, 특히 아빠는 한 동안은 어려운 시기를 보낼 것 같다.

온전히 쏟아낸다고 후회 없는 사랑이 아니었다.

무한대로 흘러나오는 사랑이 쏟아내고 쏟아진다고 비워질게 아니었다.

아직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랑은 계속해서 조금씩, 닿는 곳들을 아프게 녹이고 있다.


처음 제대로 언어로 흘려보낸다.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 사랑합니다.


아가 같은, 천사 같은 큰 아빠가 너무너무 짙게.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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