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삶의 발명> 독서 기록
축 처질 때 명랑함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 화가날 때 현자가 될 수 있는 방법, 무료할 때 순간을 활기차게 바꿀 수 있는 발명품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도구들만 있다면 행복한 감정들만 가지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테니까. 그럴수만 있다면 마음 속 어두운 동굴로 떨어진 나를 끄집어 구해낼 수 있을거니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줄테니까.
더 나은 삶이란 과거보다 더 앞으로 나아간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었던 것들은 마법같은 방법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저 버텨내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미움을 사포질하며 그럼에도 사랑하던 노력같은 것들이 유효했다는 것을. 어려운 상황에도 아주 얇지만 한 겹씩 쌓여간 연약한 마음의 레이어들이 나를 더 나아가게 해줬던 것 같다. 세상에는 어떤 상황에도 또렷하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마음과 태도일지 늘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으면 마음이 흔들릴 때도 마음이 향하는 방향 정도는 알 수 있고, 어두운 날도 저 밑바닥까지 어둡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혜윤 작가의 생각이 딱 그렇다. '전부를 읽고 전부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와 어느 가치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고 싶을까?' 질문을 앞에 두고, 남몰래 든든한 마음을 가지게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이 들때 작가는 묻는다. “어느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싶어?”. 글은 정혜윤 작가 <삶의 발명>에 대한 독서 기록이다.
책에는 삶을 의미있게 바라보고 행할 수 있는 발명의 태도들을 다수의 이야기로 담고 있다. 그러나 영화처럼 마냥 반짝이고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은 그런 것이니까. 어떤 이야기는 외면하기 쉬운 아름다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힘겨운 사랑을 지탱해낸 믿음과 강인함이 깃든 이야기도 있다. 작가는 상실의 감정을 겪은 유가족을 주인공으로 ‘사랑의 발명’ 파트를 구성했다. 대구 지하철, 씨랜드, 세월호, 게리 퍼거슨, 14번 늑대의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경험한 유가족들이 어떻게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지, 그 사랑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하나의 이야기로, 미국 옐로스톤 국립 공원의 14번 늑대는 배우자였던 13번 늑대가 죽자 홀로 서쪽으로 떠나 30km을 떠돌다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마 배우자를 기리는 여행을 떠났을 것이라 작가는 생각한다. 늑대처럼 우리도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신체는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기관으로 이루어져있다고 하는데, 이는 상실의 아픔이 내부로 들어왔다면 그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외부를 향해야 한다는 뜻이 될수도 있다. '사랑의 발명' 파트에서는 상실을 겪은 유가족들이 외부를 향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장면들을 엿볼 수 있다. 여정에서 돌아온 유가족들은 희망을 선택했었다. 세상에 귀기울이며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막는 사람으로, 상실의 아픔으로 타인이 살아갈 힘을 뺏기는 일이 없도록 힘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들 누구요?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나? 나는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을 둔 아버지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말합니다. 지금 잘하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꼭 좀 구해주세요.”
과거 나는 연민의 감정 반, 하지만 내 이야기는 아니라는 희미한 구분선을 그으며 사건들을 대해왔다. 바깥 세상의 희망이 되고자 사랑을 행하는 유가족들을 보니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새로운 앎은 새로운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언제적 일’ 같은 정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지금, 유가족들이 혼자서 겪어내고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 많지 않도록, 오늘 책을 읽어 희망과 사랑에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넷플릭스에서 인기를 끈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은 주인공 '크레이그'가 바다에서 겪고 느낀 삶의 경이로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시선을 바다나 문어가 아닌, '크레이그'로 옮기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실제로 삶의 어느 단계에서 영혼이 소진된 크레이그는 퇴직 후 바다에서 잠수를 시작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설명한다. 도대체 바닷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단 말일까?
크레이그에게 삶의 의미는 바다 속에서 잠수하며 특권적인 경험을 즐기는 것, 거대한 자연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그 일부가 되는 것과 같은 순수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사회에 속하며 자아 실현을 쫓는 우리에게는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핵심은 그를 만족하게 하고, ‘이 삶은 소중하다’라고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명해낸 것이다. 크레이그는 크레이그만의 가치가 있듯,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기준도 삶을 완성하는 방법도 모두가 다를 뿐이다. 삶의 의미는 삶을 가치있게 사는 데 있고, 우리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자아를 실현하며 삶을 살아내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크레이그의 경험은 우리 모두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의미를 주는 단어를 찾아내면, 그 힘을 주는 단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크레이그에게는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래?’이고 혜윤 작가에겐 ‘2번 돌고래!’가 그랬다. 돌고래와 새 이야기도 재밌으니 책에서 꼭 확인해보길 권한다. 이야기를 찬찬히 읽어 내려다가 보면 살면서 자신의 힘을 찾고, 길을 찾고, 평생 골몰할 관심사를 찾는 삶의 발명을 우리도 충분히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함을 준다. 인간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즐겁게 살 수 있으며,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매일 기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삶에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여러 감정과 태도들도 존재하지만, 이런 감정들을 버무려 '이 것을 빼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 고유한 가치도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어떤 평범한 하루가 유난히 빛이 나는 하루로 기억에 남는다면 어떤 한 순간이 진실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 순간엔 어떤 이야기나 문장, 함께한 사람이 빛의 토대가 되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고유한 존재가 되기 위한 여러 감정과 느낌, 태도, 그리고 이야기도 풍부한 책이었다. 어떤 것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자아를 실현할 것인가. 그리하여 내 인생의 책을 한 권 만든다면 그 책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인가. 책을 덮으며 고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