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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Jun 24. 2022

영화 <더랍스터> : 물음표를 끊임 없이 던지는 영화

목적과 형태가 모두 규정된 그런 사랑. 그게 정말 사랑인가?

2020.6.23.에 쓰여진 글 


영화 <더 랍스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의든 타의든 커플이 아닌 자는 한 호텔에 들어와야 하고, 거기서 45일 동안 짝을 찾지 않으면 자신이 원하는 동물이 되는 징벌이 내려진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호텔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사냥할 시간이 주어지고 N명의 사람을 잡아오면 호텔 체류 기간이 남은 기간 +N일이 된다. 마취총으로 사냥을 하는데, 잡힌 사람의 최후는 등장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가 원했던 동물로 변하겠지. 그렇다면 왜 본인의 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동물로 변하는가? 동물로 변하는 것을 징벌로 내린다는 것은 '짝을 찾지 못한 자는 사람으로서의 할 기능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삶은 동물과도 같다고 보는 관점의 이유가 궁금했다. 사실 영화에선 왜 짝이 없는 자에게 규제를 내리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유에 대한 것은 공란으로 남아 그걸 채우는 건 관객들의 몫이 된다.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 왜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짝이 있어야 하는가? 짝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왜 사회에서 도태되는가?

다른 흥미로운 점은 호텔에서 어떻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호텔에서 댄스 파티도 열어주고 수영장이나 기타 편의시설에서 대화할 시간도 충분하다. 그런데 여기서 커플이 되는 과정은 적은 케이스로 설명되고 이들의 공통점은 이러하다. 나의 부족함이나 결핍과 같은 부분이 상대방과의 공통분모가 되는 것으로부터 둘의 관계가 시작된다.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억지로 코피를 쥐어짜는 한 남자의 모습이 다소 기괴하나 낯선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호감 또는 공감을 사고자 노력하고 그와 닮은 것처럼 연출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아닌 모습을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전혀 이질감 없이 현실적이었다. 그런데 두 가지 점에서 다시 이 부분을 짚어봐야 한다. 왜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관계를 전진시키기 위해선 그 사람의 공통점을 억지로 취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가 내 자신이 아닌 연출되고 꾸며진 모습으로 그 사람에게 사랑 받고 둘이 연인으로서 나아가는 게 진정 사랑이 맞는가? 또 반대로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이 나와 닮았다는 이유로, 내가 가진 상처나 결핍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이루지는 건 타자와의 사랑이 아닌 내 자신과의 사랑, 즉 자기애에 더 가깝지 않은가?

영화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장면은 총 2가지다.

하나는 주인공이 호텔에 도착해서 슬리퍼를 배부 받는 장면. 이때 호텔 직원이 주인공에게 발 사이즈를 물어보고 주인공은 44.5라 답한다. 그러자 직원이 그런 사이즈는 없다며 44 또는 45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고, 주인공은 후자인 45를 선택한다. 나는 이때 45라는 숫자를 인상 깊게 보았는데, 그 이유는 호텔에 들어온 사람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체류 기간이 45일이기 때문이다. 호텔에 들어온 자들은 사랑을 해야'만' 한다. 정해진 규율에 맞춰서 목적을 이뤄내야 한다. 즉 나에게 맞지 않을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내게 주어진 틀에 맞춰야 동물이 되지 않고 사람이 되어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45라는 숫자는 온전한 내 자신이 아닌 어떠한 규제 속에서 나를 맞춰야 하는 것을 상징하는 숫자로써 영화 속에서 연출되었다고 보았다. 이와 더불어 이성애와 동성애 가운데 호텔 운영 상 문제로 이성애만 가능하다는 직원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사랑이 어떠한 규제로서 이루어질 일인가? 억지로 사랑을 해야 하고, 그 사랑 역시 자유롭지 못한 영역에 있다. 목적과 형태가 모두 규정된 그런 사랑. 그게 정말 사랑인가?

두 번째 장면은 거의 후반부로서 장님이 된 여자와 주인공이 도시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장면. 둘이 몰래 도망치는 걸 준비했기에, 그 전 날 밤에 옷을 제대로 고르지 못해서 본인에게 꽉 끼는 바지를 입은 주인공. 그는 뒤뚱뒤뚱 걷는다. 눈이 먼 여자보다 더 보폭이 느리기까지 하다. 이 부분이 나에겐 의미가 있었다. 위와 마찬가지로 그저 밤이 되었고 어두운 상황에서 바지를 제대로 고르지 못해 동행하는 길에 삐그덕 거리는 주인공이, 과연 여자를 따라 눈이 먼다면 얼마나 더 이 둘의 걸음은 더디고 느려질 것인가? 제대로 걷지 못한 채 불안해 보이는 둘의 모습이 어딘가 닮았다는 애처로움보다는 둘은 과연 지금처럼 서로 잡은 두 손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다소 느리게 걷더라도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걸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남자에게 그 여자란 잘 맞는 바지였을까? 꽉 끼는 바지가 아니라?

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을 두고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인셉션> 정도로 충격적인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련을 딛고서 이제서야 숨통을 놓이며 서로 사랑할 수 있는 환경에 주어졌는데. 여자를 따라 눈을 멀게 하려는 남자. 그런 남자를 홀로 기다리는 여자. 남자와 여자에겐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 지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고 끝났다.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영화였다. 내 마음과 내 몸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의 규제와 압박 속에서 이뤄지는 사랑이 가진 면을 영화는 주목했다. 이어서 같음을 사랑하고 그것이 둘을 묶어주는 결정체라고 보는 시선도 겸비했다. 나와는 다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나의 일부 영역을 가진 자에게 마음을 여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이기적인 형태의 모습을 지닌 사랑의 단면들이 자주 언급된다. 무엇을 위해 사랑을 하는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나 자신을 향하도록 설계된 영화였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가? 정상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일부분을 타인에게서 보고 그 부분에 안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러라고들 하니까?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이성과의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인가? 이성애만이 유일무이한 사랑인가?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는 자는 동물과도 다름이 없는가? 자유로운 동물이 되어 압박에서 벗어나는 게 낫는가? 아니면 영원히 무언가에 맞춰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게 진정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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