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고전 순례 (0) 序
미국 남부 특유의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MBA 과정의 첫 1년이 지나가고 약 3개월 반 가량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오늘 밤까지 제출하는 과제도 없고, 상사에게 진행 경과를 보고해야 하는 중대한 프로젝트도 없다.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키고 Gym에서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아침 9시 무렵인데 그때부터 아이가 하교하는 오후 5시 무렵까지 온종일 책을 읽는다. 한 자세로 책을 읽다보면 금방 무료해지기 마련이므로 다양한 자세로 책을 읽는다. 앉아서, 누워서, 엎드려서. 그래도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누군가에게 자세를 검열받을 것도 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는 점은 무척 행복하다. 손에 잡히는대로 시선이 이끄는대로 여러 책을 읽던 중, 우연히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펴낸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를 몇 권 읽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이어 이디스 해밀턴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기 시작하며, 나는 소위 무지성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책을 읽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도 꽤나 신경이 쓰이는 일이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이 시리즈의 책을 계속 읽어보자는 마음이었다. 다만, 그것이 나의 인문고전 순례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왜 인문고전 책을 읽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지난 13년 동안 내가 책을 읽으며 품어왔던 다른 두 질문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왜 인문학 책을 읽어야 할까? 그리고 왜 고전문학을 읽어야 할까? 이 두 질문은 마치 내 영혼을 두드리는 울림처럼 내 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여러 번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15년 전 지금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인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을 계속해서 읽어왔다. 2024년 5월 기준으로, 지난 13년 동안 878권의 책을 읽었는데 문학, 철학, 역사, 또는 일반 인문 교양도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을 595권 읽었다고 나의 기록은 말한다. 가장 적게 읽은 분야는 경영 또는 경제 분야인데 전체 읽은 목록 중 10% 수준인 60권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 했기 때문에 굳이 이런 쪽에 추가적인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경영학을 공부했음에도 더이상 관련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애초부터 경영학이 나의 본성에 맞지 않았다는 것일까. 어느 쪽일까.
지난 13년 동안 읽었던 595권의 인문학 책 …… 그 시작은 박웅현 씨의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책을 읽던 2010년 1월, 신입사원 연수 과정 때였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막연히 대기업을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던 몇 개 기업 중에 지금의 기업에 오게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이 기업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많지 않았다. 나는 신입사원 연수를 위해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합숙 장소로 향하던 그 순간에도 실기에서 탈락한 모 방송국 PD 자리가 계속 생각나고, 합격 후에 끝까지 고민하다가 거절 메일을 보낸 모 컨설팅 펌의 컨설턴트 자리가 생각났다. 방송국 PD나 컨설턴트가 꼭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꼭 가고 싶은 직장이라거나, 꼭 되고 싶은 어떤 롤모델이라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기업이나 방송국이나 컨설팅펌은 서로 등가였다. 신입사원 연수라는 순간에도 시큰둥했던 나의 마음은 가지지 못한 것,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집착과 근거없는 후회에 가까웠다. 스물 여섯 살의 나는 첫 직장에 착근하지 못했고,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사회인으로 바뀐다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 유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박웅현 씨의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책을 왜 연수 과정에 들고 갔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광고 카피라이터가 어떤 일을 하며,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잘 모르면서 막연히 그 직업을 대학생활 후반기 내내 동경했고 그래서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 같은 어렴풋한 감정을 담아 그 책을 연수 과정 내내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웅현 씨의 책이 제목과는 별개로 정말 인문학 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돌이켜보면 고개를 갸웃한 측면도 있지만, 적어도 스물 여섯의 나는, 그 책을 읽고 있으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장소에서 함께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있는 다른 동기들과 내가 다른 존재라고 스스로 느끼곤 했다. 비록 나는 여기에 앉아 크게 재미없는 석유산업의 역사를 배우고, 게임을 통해 기업을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만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여기에 속해있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두 달 반 가까운 연수 과정 동안 나는 그 책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해서 읽었다. 박웅현 씨가 만든 광고 카피를 거의 모두 외울 정도로.
2010년 봄 본격적인 직장생활이 시작되었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지만 읽은 책을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2년 뒤인 2012년부터였다. 새해 첫 날에 <신기한 수학 나라의 알렉스> 라는 수학 책을 읽고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읽은 책의 제목, 작가, 출판사, 분야, 읽은 기간, 짧은 감상평을 한 줄 한 줄 남기기 시작했는데 일종의 아주 간단한 독서기록이었다. 연도 별로 탭을 만들어 똑같은 양식으로 나의 읽기의 일기를 남긴 것이 이제 13년이 되었는데 시인 이성복의 고백처럼 내겐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밖에 없는데 …… 라는 마음이다. 무언가를 내가 꾸준하게 한것은 이것이 전부이며, 꾸준하게 했음을 증명하는 것 역시 이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책 읽기와 책 읽기의 기록을 시작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는 책읽기의 의미를 한 번 정리를 하고 싶었다. 왜 인문학 책을 읽으려고 하는지 클리셰 같은 질문에 클리셰 같지 않은 답을 하고 싶었다. 길고 긴 사유의 끝에 내가 내린 답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인문학 책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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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당시 나는 회사에서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에 있었는데 사람을 대하는 업무, 그것도 회사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이익이 아닌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외부의 사람을 대해야 하는 대외업무 부서는 꽤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왔다. 사람들을 온전히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믿지 않으면 일을 해 나갈 수 없었던 상황은 내가 나의 일을 완전하게 장악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게 했고 자꾸만 나와 일을 격리 시켰다. 일에 녹아들기는 커녕 매일 가까스로 버티는 느낌이었고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의 나와 개인으로서의 나는 분리되어 있었고 회사는 개인이 존재하기 위한 밥벌이의 터전에 가까웠다. 많은 직장인이 그러했듯이 나도 회사와 나를 일치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독특한 정체성이랄까, 그런 것을 직장인이라는 이유로 지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INFJ 성향에 기대어 내향적으로 원대한 미래와 엉뚱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나를, 현실에서의 옳고 그름보다는 과거의 역사를 지혜라는 이름으로 엿보고 싶은 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방법으로 인문학 책을 찾게 되었다. 마치 내가 지키려는 나의 모습이 책 안에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심보선 시인의 <그을린 예술>, 완월동 성매매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 백화현 교사의 <책으로 크는 아이들>, 이진경 작가의 <파격의 고전>, 임지현 교수의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한 회사의 성공과 파산을 솔직하게 담은 이건범 작가의 <파산>, 고 서경식 작가의 <시의 힘>,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고뇌의 원근법> …… 존 서덜랜드가 <문학의 역사>에서 우리는 치즈 속의 구더기들이라는 말처럼 나는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닮고 싶은 독서가의 형상도 없이 구더기가 치즈를 조금씩 갉아먹어 나가는 것처럼 계속해서 인문학 책의 호수에서 허우적댔다. 그 허우적거림이 나를 사라지지 않게 만들것이라고 믿으며 조금씩 책의 탑을 쌓아 나갔다.
인문학 책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소외된 분야는 문학이었다. 2012년부터 독서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이후 6년 동안 문학으로 분류되는 책은 452권 중에 56권에 불과했다. 그것도 시와 소설이 아니라 단지 서점에서 문학으로 분류되는 교양 도서가 대부분이었다.
문학에 시선이 가지 않은 이유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부정확한 감정 때문이었다. 내가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것, 뭔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건 어디까지나 현실 속 ‘나’에 관한 것이었다. 회사 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삶이 점차 고정된 틀에 매여 갈 수록 나의 의지만으로 나를 구성하기란 점점 어려워진다. 의무가 많아지고 제약이 많아지고 해야 할 역할은 늘어난다. 가까스로 애쓰지 않는다면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범적인 역할만을 수행하거나, 뭔가를 갖고 싶다 또는 뭔가를 얻고 싶다는 세속적인 욕망으로만 가득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현실 속의 ‘나’였는데 문학은 현실도 아니었고 나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텍스트에 담긴 허구의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계속해서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문학은 내가 모르는 가상의 ‘너희들’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018년이 도래했다. 나이는 서른 중반에 가까워져 있었다. 계속해보겠다는 소설 제목이 특이해 그 이름을 기억해 둔 작가가 있었는데 나와 이름 초성이 같다는 이유로 더욱 관심이 가게 된 황정은 작가의 소설 세 권을 연달아 읽을 기회가 있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웃는 남자>, <아무도 아닌> 책을 읽으며 나는 계속 어? 라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여전히 황정은 작가가 창조해낸 텍스트는 허구에 가까웠지만 그 서사가 거짓이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가 구성한 서사에 깊숙하게 정신을 담궜다가 빼내야 할 때, 조금 더 이 서사 속에 있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서사가 어딘가에는 진실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난 내게 아무 변화가 없다고,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문학의 문이 내게 열렸다. 황정은 작가의 책을 읽고 난 이후에 집 서가에 어떤 문학 작품이 있는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그제서야 하게 되었다. 아내가 얼마 전에 구입했던 문학동네 출판사의 <안나 카레니나> 1,2,3권을 홀린 듯이 한 주에 한 권씩 3주 동안 읽어나갔다.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질 때 촛불이 일렁이다가 함께 꺼졌다는 장면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일렁이는 전율을 느꼈다. 문학 중에서도 고전문학은 그 동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미지의 지평이었다. 단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입소문을 타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생각, 오래되었기 때문에 세련되지 않고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보기 좋게 사라졌다.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전 문학에 열광하는지 그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것만 같았다. 또 다른 문이 열렸다. 고전문학이라는 문이 열렸고 나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이후 5년 동안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물리학에 비유해보면 고전문학은 입자, 현대문학은 파동에 가까웠다. 현대문학은 계속해서 일렁이고 울렁이고 변화하고 세심하게 움직이는 파동이었다. 나는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세계의 사건, 타인의 행동에 나의 감정으로 반응하게 된다. 나의 호불호에 따라 외부의 사건과 행동을 재단하게 되기 때문에 나의 감정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계속해서 변화할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감정의 감촉은 너무나도 여리고 섬세했다. 너의 기분은 대략 이런 것 아니야? 라는 질문은 오히려 불쾌했다. 대략적인 감정이라는 건 없었다. 나의 감정의 원인과 양태 모두 구체적이었고, 감정의 구체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타자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파동과 같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나의 감정을 이해해주는 것은 현대문학이었다. 혹시 지금 네가 느끼는 감정은 이러한 것 아니냐고, 네가 처한 상황은 이러한 것에 가깝지 않냐고 묻는 문학 속 주인공의 질문마저 파동으로 내게 다가왔다. 파동과 파동이 만나 일치하는 지점이 있을 때 현대문학이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주로 한국 현대작가들이 그렇게 세심하게 다가왔다. 김연수, 권여선, 김영하, 백수린,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을 읽고 있으면 많은 이들이 고백한 것처럼 나도 위로받고 치유받는 기분이었다.
반면 고전문학은 단단한 입자였다. 고전문학은 작가도, 작가의 국적도, 언어도 모두 다르지만 대부분 비슷한 주제 의식을 다룬다. 선과 악, 사랑과 증오, 자유와 억압, 순수와 타락, 우연과 필연, 운명과 자유의지와 같은 개념이 반복된다. 그러나 그 몇 안되는 주제의식의 반복을 우리는 지루해하지 않고 언제나 즐겁게 경험하고 마는데, 이런 것들이야말로 수 십 억 명 인간이 몇 천 세대를 거치며 함께 경험해 온 삶의 교집합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선과 악을 고민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밖에 없고 운명과 자유의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 마련이다. 이것들은 파동이 아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람이라면 모두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입자의 성질에 가깝다. 그래서 서로 다른 고전문학에서 똑같은 입자를 발견할 때면 나는 우선 너무나 즐거웠고 한편으로는 현대문학과는 다른 의미로 위로받게 되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보바리 부인>,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최명희의 <혼불> 모두 당대에 규제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랑과 인연을 다룬다. 인간이 서로 설정한 윤리의 선을 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불륜 (不倫)이다. 우리 모두 우리를 옥죄고 있는 윤리의 선을 조금은 넘어보고 싶어하지 않던가.
그래서 고전문학을 5년에 걸쳐 50권 정도 읽고 나니, 나는 인문학 책을 처음 읽으며 들었던 “사라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문장을 고쳐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비슷한 고민 속에
누구나 비슷하게 살아가고
누구나 영광과 좌절의 순간이 시간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찾아오고
완벽하게 행복한 사람도 완벽하게 불행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너와 완전하게 다른 독창적인 나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수히 많은 너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번뇌와 욕망은 400년 전에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비극 속에서 햄릿이, 리어 왕이, 맥베스가 경험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계를 수 천 년 더 앞으로 돌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양상과 현대인의 하루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적당히 서로 비슷하고 적당히 조금 다른 것마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다. 20대 후반의 나는 사라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다. 30대 후반의 나는,결국 우리는 비슷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생각을 더 하게 된다. 너와 나를 구분짓고 나만의 고유성이라는 것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너와 내가 비슷한 것이 무엇인지, 오늘의 내가 우리의 어떤 비슷한 생각에서 기인한 것인지 그런 것들을 책 속에서 찾고 싶어진다. 나도 너와 같은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2024년 여름을 앞두고 인문고전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 과거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의 우리들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고 싶다. 윤리적으로, 인식론적으로, 수사학적으로, 신화적으로, 문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자연철학적으로 과거의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포획하려고 했는지 그런 것들에 관심이 간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인문학 책을 읽어보려 하는 것이다. 다만 그때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인문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다.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저항하기 위해서다. 파동에서 입자가 되기 위해서다.
https://graham.uchicago.edu/programs-courses/basic-program
미국 시카고 대학교 그라함 인문학부 (Graham School of Continuing Liberal and Professional Studies)에서 개설한, 4년 과정의 인문고전 읽기 강좌(Basic Program of Liberal Education)가 있다. 가을학기에 수업이 시작되어 겨울, 봄학기까지 세 학기로 1년 수업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총 12 학기 동안 50여 권의 인문고전을 읽는 강좌다. <그리스 로마 신화> 부터 플라톤의 <파이돈>까지 총 52권의 책을 앞으로 1년에 걸쳐 읽어본다. 2018년부터 5년 동안 고전문학의 세계에서 헤엄쳤다면 이제는 인문고전을 정식으로 읽어볼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인문고전을 읽고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 이번 여름부터 1주일에 한 권씩 인문고전을 52권 읽어볼 생각이야.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 시카고 대학에서 개설한 인문고전 강의 커리큘럼을 따라갈 생각인데 이런 저런 고전 작품들이 있어.
아내: (가만히 듣다가) 그런데 <미국 독립선언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같은 건 우리 같이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지?
아내의 말이 옳다. 서양의 인문고전이 동양에서 온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나는 무엇이 되어있을까? 그래도 데카르트를, 뉴턴을, 소포클레스를, 마르크스를, 플라톤을, 아담 스미스를, 아리스토텔레스를, 다윈을, 프로이트를, 그들의 사상을 죽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원문으로 읽었다는 자기 만족은 있지 않을까. 그 만족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이유가 된다.
몇 년 전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펴낸 박세미 시인의 <내가 나일 확률> 시집을 눈여겨 읽은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했던 건축을 전공했다는 시인의 이력 때문에 그 이름을 잘 잊지 않고 있었는데 재작년(2022년) 잡지 문학과사회에 "다만 나는 오늘의 맥락이 된다" 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박세미 시인은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파편화된 이 시대에, 오로지 현재만을 휘발시키며 살고 있는 나에게 어디론가 치켜들 손가락 따윈 없다. 나는 다만, 하루 하루 주먹을 쥐고 생활과 겨룰뿐이다." 라며 오늘의 맥락이라는 의미를 풀어 설명했다. 박세미 시인에게 오늘의 맥락은 슬픈 어감이다.
다만 나는 예전 황혜경 시인의 문장을 오래도록 좋아한 것처럼, 이 문장을 오래도록 곱씹게 된다. 인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오늘 나의 맥락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글을 읽고 나의 생각을 짓고 결국은 나의 글을 쓰는 것. 그래서 나는 다른 의미로 다만 나는 오늘의 맥락이 된다. 그 맥락 위에서 이것들을 돌아볼 뿐이다.
자,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