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고전 순례 (1) 안티고네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점 중 하나는 생각보다 미국 사회에서 법 이외의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미국은 독립선언서 이후 연방 헌법이라는 명문화된 법률에 근거하여 탄생한 국가이고 법률시장이 가장 잘 발달한 나라 중 하나일 정도로 사회의 많은 요소가 법에 의해 운용되는 경우가 많다. 법에 근거하여 행동의 정당성과 죄의 유무를 판단하고 법의 해석에 따라 이권이 결정된다. 헌법과 같이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법률이 아니더라도 텍스트로 명문화된 여러 종류의 규약과 계약은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바탕 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집단보다는 개인의 가치관과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식이 합쳐져, 미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외와 인정은 크게 통용되지 않고 그냥 제 할 일 알아서 잘 하면 되는 문화라고 혼자 쉽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크게 봤을 때 이런 생각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미국에서 지금까지 1년 가까이 머물며 느낀 것은 법률 이외의 요소들이 사회를 지탱하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라는 점이다. 법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수 있는 텍스트가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들. 이것을 도덕, 정의, 상식 중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 텍스트로 정의되지 않은 불문률에 따라 미국 시민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아낌없는 정을 표현한다.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법률과 이익 너머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미국에 와서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MBA 수업을 듣던 도중 교내에서 총격 사고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수업을 듣는 경영대학은 다소 캠퍼스 남쪽에 치우쳐 있고, 총격 사고는 경영대학과 거리가 있는 메인 캠퍼스에서 발생한 일이라 크게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발생한 직후 캠퍼스 곳곳에 사이렌이 울렸고 그로부터 3-4시간 정도 lockdown 상태가 되어 다른 학생들과 교실에 감금되어 나가지 못하고 외부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적이 있었다. 다행히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과 함께 lockdown 상황이 해제되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놀라운 점은 다음 날의 일이었다. 지역 뉴스를 통해 총기사고 범인 추적 과정을 보았을 뿐이지 주변 현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나와 관계없는 아득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하던 아침이었다. 오전 8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 학생들이 교단으로 나가 교수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데, 어제 사건으로 인해 많이 놀랐을 교수들에게 학생회에서 자발적으로 보내는 선물이라고 했다. 맞다. 어제 사건은 박사과정을 밟던 중국계 대학원생이 교수를 찾아가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고 놀랐던 것은 교수 집단이었을 것이다. 어떤 미국인들은 비록 학생의 입장이지만 교수의 입장을 미루어 짐작하고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꽃을 생각했던 것이다. 교수는 이러한 선물을 기대하지 못했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이내 학생들과 껴안고 인사를 나누었다. 자리에 앉았던 우리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한 위로는 법에 근거하지 않았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미국에 도착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경험했던 이 사건을 통해, 1년 가까이 미국 학생들과 수업을 들으며, 그리고 미국 사람들과 공동의 생활권을 형성하며 지내는 가운데 나는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법률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라도 법률 이외의 요소가 작용하는 것들이 분명 있고, 문자로 전해지지 않는 사람 사이의 예(禮)와 율(律)은 바로 여기 미국에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며 필요한 지점에 각자를 절제할 수 있다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소포클레스의 테바이 비극 3부작 중 하나인 <안티고네>는 바로 이 성문법과 불문율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안티고네>의 내용은 이렇다.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출생의 비밀과 가족의 비극을 알고 난 뒤 방황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오이디푸스는 잘 알려진대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신화 속 인물이기도 하고, 아버지-어머니-오이디푸스 사이의 비극적인 삶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개척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장하며 잘 알려진 위인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에게는 두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는데, 안티고네는 그 중 첫 번째 딸이었다. 오이디푸스가 죽고 난 후 테바이의 왕좌를 둘러싸고 두 아들이 다투다 동시에 죽음을 맞는다. 그러자 테바이에서 섭정을 하던 크레온이 (오이디푸스 아내의 오빠이므로, 안티고네에게는 숙부가 된다) 이 두 아들의 죽음을 다르게 대하는 데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둘째 아들 에테오클레스만 성대히 장례를 치러주고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고 낙인을 찍으며 그의 시체를 산상에 내버려둔다. 크레온은 법을 내세우며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안티고네는 유일하게 오빠 에테오클레스의 시신을 수습하며 이것이 사람의 불문율이라고 말한다.
크레온
너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포고가 내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
안티고네
알고 있었습니다. 공지 사실인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크레온
그런데도 너는 감히 법을 어겼단 말이냐?
안티고네
네. 그 포고를 나에게 알려주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의 신드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나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려워서 그 불문율들을 어김으로써
신들 앞에서 벌을 받고 싶지가 않았어요.
-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저,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크레온(성문법)과 안티고네(불문율)의 대립은 결국 이들을 둘러싼 이들의 죽음으로 비극적으로 끝이 나게 된다. 안티고네, 안티고네와 약혼을 하였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뒤케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크레온 혼자 남겨진다. 그러니까 소포클레스의 이 연극 무대 위에서는 크레온 혼자 무대 위에 남아있게 되는 셈일 것이다. 혼자 남겨진 무대에서 그가 주장했던 성문법의 권위라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미국과 한국 사회를 대립적으로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어느새부터 한국 사회도 불문율이 갖고 있는 공동선의 의미가 많이 퇴색 되어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누군가의 해당 행위가 단지 헌법, 민법, 형법을 위배했는지 여부로 죄의 있고 없음을 판단하려는 기조가 강해지고 있다. 분명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저들의 행위는 용납할 수 없지만 명시적으로 위법하지 않으므로 저들은 세상에 계속 존재하려 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해외출장 시에 법인카드를 적법하게 사용했는지 여부를 두고 큰 논란이 있었다. 하루에 얼마 이상을 사용할 수 없다는 법인카드 사용 관련 규약을 두고, 그렇다면 그 범위 이내에서는 사적으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법인카드 카드깡이라며 비난했지만, 명쾌하게 그들의 행동을 법률적으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성문법은 지켰을지 모르지만 불문율은 어긴 셈이다. 자꾸만 불문율을 어기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도덕, 공동선. 이런 단어는 텍스트로 강제할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대가 변화해도 계속 존치할 수 있는 가치임은 분명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룰루 밀러에게 영감을 주었던 캐럴 계숙 윤은, <자연에 이름 붙이기> 책을 통해 분류학적으로 자연 대상을 구분하는 것 대신 전통적으로,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대상에 이름을 붙여왔던 선조의 삶을 기억하자고 이야기했다. 직관적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 크레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가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했던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