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고전 순례 (2) 소크라테스의 변명
소크라테스가 끊임없이 고발자들과 배심원들을 향해 항변하는 모습을 보며, 삼국지에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 이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 많은 등장 인물 중 독설가로 유명한데 사실은 재능이 탁월하고 언변이 우수하고 바른 말 하기를 좋아했던 인물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예형은 바른 말일지 독설일지를 듣기 싫어했던 태수에게 죽임을 당한다. 소크라테스도 죽음을 앞두고 끊임없이 입을 열어 자신을 무죄를 항변하고 고발자들의 무도함과 무지성을 적발한다.
고발당한 자신의 무고함을 변명하는 1차, 500명의 배심원으로부터 유죄임을 선고받고 난 이후 어떤 형벌이 적합한지를 소명하는 2차, 최종적으로 사형이 선도되자 판결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3차 변론을 읽으며 한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왜 죽음으로 향하는 소크라테스는 분노하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하는 고발자들 - 멜레토스를 위시한 아테네의 시민들 - 은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하고 있을까? 왜 저들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아주 무서운 전염병 같은 자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며 화를 내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3차 변론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이나 나를 고발한 사람들에게 전혀 분노하지 않는것” 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법정에서 마주한 두 인물 중 한쪽은 분노하며 한쪽은 분노하지 않는다는 상황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인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척하다가 무식이 탄로났다는 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이라는 부분과 맞물려 얼마 전 읽었던 칼 융의 분석심리학 관련 내용이 떠올랐다. 서울대학교 신경정신과 이부영 교수의 분석심리학 3부작 중 1부인 <그림자>와 2부인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꽤 예전부터 서가에 있었는데 그중 특히 <그림자> 라는 책을 좋아해서 지난 10년 동안 세 번 정도 반복해서 읽은 적이 있다.
이부영 교수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과 정신요법을 국내에 최초로 도입한 선구자인데 융에 따르면 우리 모두 우리 마음 속의 어두운 반려자인 그림자를 무의식 속에 지니고 살고 있다. 그림자란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나, 자아의 어두운 면이다.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인데,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열등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 내게 그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개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인데 밖에 내놓기 싫은 못난 자식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문제는 그림자가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지점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부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지 평소 생활에서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를 외부에 투영해서 누군가를 격렬히 증오하게 된다는 거다. 예를 들어 내가 굉장히 꼰대같은 상사를 보며 그를 몹시 미워한다고 해보자. 나는 워라밸을 추구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존중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강조하는 꼰대 상사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꼰대 같다는 그 상사의 부정적인 측면이 곧 내가 무의식 속에 갖고있는 나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상사의 꼰대질을 보며 나는 나의 부정적인 인격을 강제적으로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나의 부정적인 인격이 투영된 상대를 더 쉽게 증오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꼰대 기질을 나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꼰대 기질을 가진이를 공격 대상으로 삼아 격렬히 미워하는 것이다. 결국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꼰대인거다. 융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자기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이를 의식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나도 너만큼이나 부정적이고 열등한 인격의 개체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때마침 이부영 교수의 <그림자>를 몇 주 전 읽었던터라, 융의 이론 위에서 분노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와 분노하는 멜레토스를 그림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된다. 멜레토스를 보자. 그는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아테네 시민들이 믿는 신을 소크라테스가 믿지 않는다며 분노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보다 합리적인 지성을 추구하고 신에서 인간으로 관심이 넘어가야 한다는 그 마음을, 멜레토스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당대의 지식인을 대표하는 멜레토스 입장에서 그러한 전환은 일종의 금기와 같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에 이를 감금시키고, 소크라테스를 보며 격렬히 분노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정작, 신에서 인간으로 전환되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은 멜레토스 그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저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면 그리스 신화 속 신과 영웅을 저승에서 실제로 만날 수 있다며 좋아하기까지 한다. 융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그림자의 존재를 일찍 발견하고 절대적인 사상의 위험을 경고하는 셈이다. 즉, 멜로토스 안에 소크라테스가 있었으나 멜로토스는 이를 감지하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는 자신 안의 멜로토스를 발견하고 이를 외면하지 않은 거다.
때문에 타인에 대해 분노하는 이는 두 가지 의미에서 경직되어 있는 셈이다. 자신이 의식하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과 반대의 측면을 마주했을 때 이를 인정하기 어렵다. 또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 무의식 속에는 지금 자신이 믿고 있는 사상과 정 반대의 그림자들이 무수히 존재할텐데, 그림자들의 가능성에 대해 인정하기 어려운 셈이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림자를 영원히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 두 가지 경직된 생각과 행동이 만약 전복된다면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회의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지만, 비로소 자연스럽게 “나는 오직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말이다! 시인과 촌장은 <가시나무>에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라고 했다. 박세미 시인은 시집 <내가 나일 확률>에서 “몇 퍼센트입니까, 내가 나일 확률” 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도 결국은 불안했던 것 아닐까,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어느 정도로 확실한 것인지 불안했기 때문에 우리 다같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진실을 향해 대화해보자고 한 것 아닐까.
무의식 속 그림자를 의식의 수면 위로 꺼내어 힘껏 껴안을수록, 나의 존재가 절대성과 확실성 뿐만 아니라 상대성과 불확실성이 공존하는 구성체임을 인정할수록, 많은 것을 안다고 말하기보다 점점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고 생각을 바꿀수록, 타인을 향한 시선은 분노에서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박세미 시인은 책이 나오고 사인할 일이 생기는데, 이때 ‘우리가 우리일 모든 확률이 사랑’이라는 구절을 많이 쓴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사회라면,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회라면 차라리 독을 마시고 피안(彼岸)하자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
그렇게 생각하면 분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절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