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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Sep 23. 2024

자기 기만의 최후

나의 인문고전 순례 (3) 죄와 벌

황혜경 시인이 2018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고 오래도록 문장을 음미했던 시는 <동사動詞를 그리라고 하는 이웃집 아이>였다. 이 시의 화자는 걸음도 느리며 무언가 움직임을 상징하는 동사보다는 멈추어 있는 명사의 이미지에 익숙하다. 능동보다는 피동과 사동의 움직임을 선호한다. 그러던 중 이웃집에 살고 있는 아이가 “나는 아직 모르는 걸 그려 볼 거예요 못해 본 걸 그려 보세요” 라며 동사를 이미지로 그려보라고 한다. 


화자는 동사 - 주체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동사의 성질을 나타내는 주동(主動) 또는 능동(能動)을 의미할 것이다 - 의 삶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당돌한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조금씩 동사의 삶을 노력하다 보면 “힘을 얻어서 서고 걷고 뛰고 웃고 그렇게 나도 주동사(主動詞)가 될 수 있을까?” 물음을 남기며 시가 끝나게 된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읽던 2018년은 회사에서 일을 한창 많이 하던 시기였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만 10년이 되던 때라 제일 실무적인 일을 많이 할 무렵이기도 했고, 오래 몸담았던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한 첫해여서 신경을 더 쏟아야 하는 것도 많았다. 그 말인즉슨 내 의지대로 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조금은 어렵다고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바쁜 나날이 불행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일상이 수동태의 모습으로 흘러간다고 느끼기도 했다. 서른 중반의 나는 다른 의지에 의해 내 삶이 결정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에 조금씩 다른 변화를 주려고 했다. 


만약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만 몰두한다면, 주동사가 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회사 생활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내 삶의 원천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때 도피처로 찾은 곳이 고전문학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회사가 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때마침 집에는 아내가 사 온 문학동네 출판사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있어 무작정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유년기에도 전혀 읽지 않았던 고전문학의 세계에 점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헤르만 헤세로 기억되는 독일 문학은 정갈하면서도 단단했고, 서머싯 몸과 셰익스피어로 기억되는 영국 문학은 인간 본성의 정도(正道)를 보여주었고, 빅토르 위고로 기억되는 프랑스 문학은 감정과 서사의 향연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는데 비단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가 아니더라도 이반 투르게네프,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보여주는 음울하고, 섬뜩하고, 비극적인 러시아 문학 특유의 서정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2018년 초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나서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3부작인 <전쟁과 평화>와 <부활>을 읽었던 것 같고, 계절이 지나 다시 2018년 말 겨울이 되었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을 연속해서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 문학은 겨울에 읽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 때문이었다. 확실히 인간의 비극과 내면의 서사를 탐구하는 러시아 문학은 겨울과 어울렸다. 그렇게 깊어져 가는 겨울철 밤늦게까지 고전문학을 읽으며 나는 직장생활에서 소진되었던 나의 동사들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고, 삶의 한 측면의 주동사가 다른 한 측면의 수동태가 견제하며 그럭저럭 삶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쉽지는 않았다. 단 한 번에 내 삶이 주동사로 변한 것도 아니었고, 삶의 그림자 속 잉태되었던 피동과 사동의 양상이 한 번에 없어지지도 않았다. 변화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삶에 대한 생각 없이 일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았다.


2024년. 오래 전 내 삶의 화두였던 주동사와 수동태의 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6년만에 다시 읽으니,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주동사를 꿈꾸었던 수동태의 인간의 절망처럼 들린다. 전당포 노파 알료나를 살해하기 전 라스꼴리니꼬프의 삶은 수동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기 때문에 그의 가족, 특히 그의 동생인 두냐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고시원 정도 크기의 작은 방에 집세를 제때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공간마저도 그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는 피를 팔며 가족을 부양하던 허삼관처럼 죽음을 각오하지도 못하며 변변치 못한 것을 전당포에 맡기며 어렵사리 ‘돈을 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점점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길은 자신만의 주동사를 만들어가는 길이 아니다. 자신과 같은 운명의, 또다른 수동태의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으며 자신의 상대적인 능동성과 우월함을 경험하려는 것 뿐이다. 


그가 죽이기로 결심한 전당포의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떠올려보자. 알료나 역시 스스로 노동을 통해 경제적 원천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재물을 담보로 맡겨 그 차익을 얻는다. 타인의 재물이 선행되어야 알료나의 이익이 후행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또다른 수동태의 삶일 뿐이다. 그러니까 라스꼴리니꼬프가 알료나를 죽인 것은 수동태끼리의 싸움이며, 선을 넘을 수 있는 용기가 상대적으로 그에게 더 있었을 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스스로 주동사를 그려내지 못했다. 그는 타인의 수동태를 조롱하며 자신의 수동태가 그나마 능동적이라고 위안했을 뿐이다.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는 살인 이후 삶의 진정한 변화 대신에, 꾸며진 자발성과 능동성만을 계속 보여주게 된다. 그가 살인 이후 끊임없이 방황하다가 강가 근처 다리에 서 있던 중 어느 여자가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자살한 여인을 두고 몰려든 경찰관에게 수중에 갖고 있던 몇 푼 쥐어주며 이것으로 여자의 장례를 치르라고 한다. 값싼 동정심이다. 이런 일은 그 뒤에도 반복된다. 평소 알고 지내던 9등 문관 마르멜라도프가 말에 치여 사경을 헤메자 또 한 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경찰들에게 의사를 불러달라고 요구하고, 마르멜라도프를 가난한 그의 집에 데려다주고 정성껏 간호하는 모습을 보인다. “돈은 제가 다 지불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말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 후에 공황장애를 계속 겪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이런 그의 모습은 진실된 선한 마음이 발현된 것이라기 보다는 주동사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대리 만족’ 하려는 무의식이 드러난 것에 가깝다. 알료나를 살해한 이후 그는 살인의 모든 흔적과 증거를 말끔하게 제거하고, 아무도 그의 행적을 의심하는 자가 없음을 깨닫자 이제 원하던 주동사의 삶이 도래한 것이라고 오판하게 된다. 그 오판이 라스꼴리니꼬프로 하여금 술에 취해 “어때요, 만약 내가 그 노파와 리자베타를 죽였다면?” 이라며 경찰서 사무관 자묘토프에게 은근슬쩍 이야기하기도 하며, 결국 자신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하게 된다.


누구나 적당히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며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 속에 열등한 그림자를 품고 살아간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며 힘있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며 어느 정도는 피동과 사동의 삶을, 또 어느 정도는 주동과 능동의 삶을 사인/코사인 그래프처럼 교차시키며 살아간다. 그러니까 저마다 불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완전함과 불완전함이 섞인 온전한 종착지를 향해 요동치며 살아갈 뿐이다. 다만, 나의 불완전함이 너의 불완전함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자기 위로, 스스로의 답을 찾지 못한 채 완전한 삶을 타인에게 자랑하려는 거짓 가면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그 위선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훌륭한 성장소설에는 어설픈 자기 위로와 거짓 기만 대신, 고통스러운 자기 대면과 현실 인식이 등장한다. 또 성장소설의 결말이 반드시 해피엔딩은 아니다. 여전히 불완전한채로 주인공은 보다 온전한 삶을 향한 자신의 주동사를 조금씩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완전함 대신 온전함을 향해간다는 것. 그런 주인공을 지켜볼 때 진정한 자기 위로가 가능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죄와 벌>은 비록 라스꼴리니꼬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사랑의 힘을 속에서 깨닫기는 하지만, 성장소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확히는 성장소설에서 내가 경험했던 치유와 위로를 라스꼴리니꼬프에게서 얻기란 어려웠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두 가지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단순한 소재(素材)에 지나지 않는 저급한 등급 곧 범인과, 생존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발언을 하는 천품이나 재능을 지닌 비범인”, 단 둘로 인간은 구분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비범인은 범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일종의 법칙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런 법칙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적당히 서로에게 소재를 제공하고 의지를 피력하는 범인과 비범인의 합집합이며, 영원한 내적투쟁 속에서 살아가는 범인과 비범인의 교집합이다. 때로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인정하며 다채롭게 섞여 살아간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이 이가 아니라 나폴레옹임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나폴레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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