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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Sep 23. 2024

몰락의 유예

나의 인문고전 순례 (5) 오레스테이아 3부작

그림 속 칼을 쥔 여인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는 침실에서 잠에 든 노인을 살해하기 일보직전이다. 사실 그녀가 죽이려는 노인은 그녀의 남편인데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이름은 클뤼타이메스트라, 살해당하는 노인은 트로이 전쟁의 주역이었던 아가멤논이다. 이 장면은 아이스퀼로스가 기원전 5세기 집필한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 즉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중 첫 번째 비극인 <아가멤논>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이다. 약 10년 전 아가멤논은 잘 알려진대로 트로이아를 정벌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다.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헬레나를 아내로 두고 있었는데 트로이아의 왕자 파리스의 유혹에 빠진 헬레나가 그를 따라 트로이아로 가버리며, 헬레나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헬레나의 쌍둥이 언니이기 때문에 헬레나를 되찾는 싸움은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도 중요한 전쟁이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문제가 생긴다. 아가멤논이 그리스 전역에 걸쳐 엄청난 수의 군대를 소집하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트로이아로 떠나려는 그때 배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아가멤논은 이는 필시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판단한다. 신들의 마음을 달래 배를 출항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아가멤논은 자신의 첫째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바다에 제물로 바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바다가 잠잠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해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트로이아를 향해 떠나는 선단을 바라보며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아가멤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첫 번째 비극의 씨앗이다.


아가멤논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10년만에 고향인 아르고스로 돌아왔을 때에도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가멤논은 더 이상 남편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이다. 그리하여 아가멤논이 욕실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있을 때 다가가 아가멤논을 살해한다. 실제 이 비극이 무대에서 상연되었을 때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남편을 살해한 뒤 무대 가운데로 걸어나와 딸의 복수를 완성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욕실에서 칼에 찔려 죽은 아가멤논에게서는 프랑스 혁명가 장 폴 마라의 죽음을 그린 Jacques-Louis David의 <The Death of Marat> 그림을, 남편을 살해하고 당당하게 무대로 걸어나오는 클뤼타이메스트라에게서는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하고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디트를 그린 Gustav Klimt의 <Judith and the Head of Holofernes> 그림이 떠올랐다. 특히 클뤼타이메스트라와 클림트의 유디트는 너무나 잘 연결되어보였다. 남편을 죽인 죄책감과 고뇌는 거의 보여지지 않고 딸의 복수를 완성한 것에 대한 기쁨과, 살인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결합할 수 있다는 성적인 홀가분함까지 그녀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위 그림에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뒤에서 아가멤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녀에게 남편을 죽일 것을 종용하는 이가 바로 아이기스토스다. 아가멤논과는 사촌관계인 그는 아가멤논의 뒤를 이어 아르고스의 군주 지위에 오른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바로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였다. 흔히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비극 3부작은 남편을 살해한 클뤼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아들인 오레스테스가 궁으로 돌아와 어머니인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며 아버지인 아가멤논의 복수를 완성하는 이야기가 중심 서사를 이룬다. 아버지(아가멤논)는 딸(이피게네이아)을 죽였고 아내(클뤼타이메스트라)는 남편(아가멤논)을 죽였고 아들(오레스테스)은 어머니(클뤼타이메스트라)를 죽였다. 이쯤되면 친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보다 더 지독한 비극의 늪에 빠진 것이 아가멤논 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족 비극사에서 아이기스토스는 클뤼타이메스트라를 도와주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이기스토스야말로 이러한 원한과 복수의 서사의 시작점에 위치해있었다.


아가멤논의 아버지인 아트레우스에게는 튀에스테스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이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자 그의 자식을 죽여 음식으로 요리한 후 튀에스테스에게 대접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튀에스테스는 그 음식을 먹다가 그것이 자신의 아이들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경악하고 아가멤논에 의해 아르고스에서 추방당한다. 이후 튀에스테스의 아들 중 한 명인 아이기스토스는 아트레우스(삼촌)와 그의 아들인 아가멤논(사촌)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니까 아가멤논이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 제물로 바쳐 아내의 원한을 사기 훨씬 이전부터 타나토스의 씨앗이 잉태되어 있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이들 관계 속에 원한과 복수의 사슬은 대를 이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듯 계속 전승되었던 것이고 그 정점에 아이기스토스의, 아가멤논에 대한 원한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고대사에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은주혁명 당시, 혁명의 발판이 된 것이 희창의 큰아들인 백읍고가 죽임을 당한 이후 음식으로 조리되어 희창에게 대접되었던 순간임을 떠올려본다면 아이기스토스의 구원(舊怨)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이기스토스에 주목한 점은 조금 다른 측면이었다. 그는 비극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아가멤논>에서는 최종보스처럼 극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등장하여 자신의 오래된 원한에 대해 서술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가 아가멤논을 살해한 뒤 무대에 등장하자 아이기스토스 역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는 “나는 이러한 살인을 꾀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앞세워 이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시킨 진정한 흑막임을 암시한다. <아가멤논>에서의 아이기스토스는 꽤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그는 복수에 대한 동기가 있었고 그 동기는 제법 정당해 보이며 자신이 직접 살인을 실행하지 않는 매력적인 방식으로 복수를 완성했다. 극의 마지막에 등장하여 최종보스로서의 신비함마저 자아낸다. 그러나 비극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 등장하는 그는 초라하고 평면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르고스로 돌아와 어머니인 클뤼타이메스트라와 정부인 아이기스토스를 살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아이기스토스는 잠깐 등장하여 외마디 비명소리를 지른 후 오레스테스에게 죽는 것이 전부이다. 


이때 아이기스토스는 신분을 속인 오레스테스의 정체를 의심하거나 오레스테스를 확실히 제거하기 위해 더 큰 악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다. 큰 감흥없이 죽을 뿐이다. 즉 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의 그는 오레스테스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아가멤논>에서 아이기스토스는 입체적인 주체였으나 시간이 지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는 평면적인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는 입체에서 평면으로, 주체에서 대상으로 몰락한 셈이다. 아이기스토스의 비극은 단지 그가 살해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서사가 평범하게 몰락한 것에 있었다……


비극에서는 귀향, 발견, 계략, 복수, 희생, 추방, 탄원, 구원과 같은 요소가 반복되고 변주된다. 


내가 눈여겨본 비극의 요소는 <몰락>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영웅도 시간이 지나면서 찬란했던 입체성이 퇴색되고 특정 인물의 전형성만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다른 위대한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도구 또는 배경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신화 속에서는 영원불멸하며 위대했지만 기원 전 5세기 그리스 비극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는 시점에서는 인간세계 비극의 배경과 조연으로 등장하게 된다. 과거 영광과 고뇌의 몫은 신들의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인간의 몫이며 신은 옆에서 이를 해설하는 역할로 바뀐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역시 누군가의 몰락을 완성하기 위한 나만의 서사의 주인공으로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누군가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몰락하게 된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7,8년 정도 되었을 무렵 나의 자신감과 자만심은 절정에 달해있었다. 30대 중반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나이에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어디에서나 나의 쓰임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했다. 그때 같은 조직에는 부장, 팀장이라는 높은 직책은 가졌지만 어딘가 생기가 부족해보이는 40대, 50대의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을 아저씨라고 불러보자. 30대 중반의 나는 아저씨들이 파워포인트로 자료를 만드는 능력이 부족하고 어딘가 최신 트렌드에 뒤쳐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고 내 서사의 기수가 상승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들 역시 분명 자신이 20대, 30대 때에는 자신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가던 주체였을 것이었다. 젊고 기민했던 나는 느리고 둔한 아저씨를 배경삼아 빠르게 일하며 나름의 성공 서사를 만들어왔지만, 언젠가는 나 역시 후배들에 의해 의심받고 은밀히 조롱받고 혹은 살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마흔 살이 되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을 읽으니, 몰락의 비극이 내게도 다가올 시점이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과연 아가멤논을 죽여 자신의 서사를 완성시키던 시점의 아이기스토스와, 오레스테스에게 맥없이 죽임을 당하는 아이기스토스 중 어느 편에 더 가까울까. 나는 몰락을 시키는 입장인가 몰락을 당하는 입장인가. 이 두 입장 사이에서 몰락은 영원히 반복된다.


몰락의 반복이라는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의 서사 역시 언젠가는 퇴색될 것이라는 생각, 타인을 살해하며 성장한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몰락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패배가 아니다. 몰락은 선택이 아니며 운명이기 때문에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공통적으로 찾아온다.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는 어쩌면 행복한 비극일 수도 있다. 최소한 죽는 이유는 알고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몰락의 반복에서 벗어나기 위한 두 번째 길은, 끊임없이 서사를 창조하는 인물로 남아있기 위해 어떻게든 몸부림치는 것이다. 악을 물리치거나 선행을 베풀거나 계략을 획책하거나 음모를 꾸미거나 그 어떤 방향과 방법도 상관없다. 내가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나의 서사가 빛을 잃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하며 이것이 성공할수록 나의 몰락은 점차 늦게 도래한다. 비극의 유예인 셈이다. 


보다 나이가 어렸을 때의 나는 두 번째 길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고 이를 실현하는 이들을 동경했다. 표면적으로 나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독립잡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창조적 행위를 하며 나의 존재를 입증하려 했다. 전설의 프로듀서 릭 루빈의 조언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러한 창조적 행위가 끝나는 순간 나의 서사는 중단되고 타인의 서사에 의해 나의 존재와 생사가 결정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을 오래도록 존경해왔다. 매월 음원을 발표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지켜왔던 월간 윤종신 <月刊 尹鍾信>을 오래도록 좋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2010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놀랍게도 지금까지도 매월 음원 하나씩을 발매하며 서사를 계속 만들어나가고 있다. 월간 윤종신을 처음 접했던 것이 2010년 겨울이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월 하나씩 음원을 발표한다는 점이 무척 놀랍다. 그 꾸준함은 가끔 큰 변곡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17년 윤종신이 설립한 기획사 미스틱스토리의 음악 플랫폼 프로젝트인 Listen을 통해 윤종신이 발표한 <좋니> 노래가 큰 인기를 얻었는데, 그건 윤종신이 월간 윤종신을 포함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꾸준하게 음원을 발표해 온 서사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월간 윤종신>은 홈페이지에서 “월간 윤종신의 행보를 요약할 수 있는 가장 적확한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꾸준함’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꾸준함…… 꾸준히 뭔가를 기획하고 획책하고 실행하여 서사를 기록하고 타인으로부터 살해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태도. 조금이라도 더 늦게 나의 몰락을 뒤로 유예시키며 입체적인 주체로서 생존하고 싶다는 욕망. 그런 삶은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삶은 나의 서사와 타인의 서사 사이의 치열한 전투이고 누구나 쉽게 죽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이다. 나는 아가멤논이 자신들의 비극을 경고하던 카산드라의 말에 귀 기울이며 클뤼타이메스트라를 먼저 제거하려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이기스토스가 자신을 죽이러 온 오레스테스를 제거하기 위해 꾀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승하던 서사의 급격한 몰락은 어떤 면에선 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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