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고전 순례 (6) 니코마코스 윤리학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때 같은 반에 사춘기가 다소 일찍 왔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공부에 뜻이 없어 불량한 학생들과 어울리는 유형도 아니었고, 나와 아파트 같은 동 옆 라인에 살았기 때문에 가끔 가서 같이 게임하며 함께 놀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던 그 아이는 6학니 되자 자신만의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아졌고, 남에게 쉽게 짜증내며 사춘기가 시작되었는데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했던 과목 중 하나는 도덕 시간이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입은 40대 중반 정도의 남자 선생님이 우리에게 도덕 과목을 가르쳤는데, 그 친구는 일부러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고, 왜 하지 않냐고 질책하면 말대꾸를 하며 대들었고, 말대꾸를 한다며 혼을 내면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이 왜 선하지 않고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하느냐며 선생님을 보고 위선자라고 뒤에서 수근거렸다. 회초리를 갖고 다니며 아이들을 때렸던 다른 남자 선생님과 달리 도덕 선생님은 화를 잘 내지 않았고 늘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친구가 선생님에게 대들 때에는 그도 열받았는지 책상을 발로 세게 걷어찼던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조금은 친구와 비슷하게 생각하곤 했다. 다른 과목도 아니고 도덕 선생님은 항상 흔들림없이 착한 모습이어야 하는거 아니야? 라며.
아주 어렸을 때에는 바른 생활, 그 다음에는 도덕, 고등학교에 와서는 수능 사회탐구 영역의 선택과목 중 하나인 윤리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려서부터 도덕과 윤리를 오래도록 배워왔는데 그건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정해주는 일종의 기준선에 가까웠다. 사회 통념 상, 혹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공통적인 가치에 비추어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을 가르고,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가르고, 선과 악을 가르고 …… 어떻게 보면 도덕은 모든 것을 이분화 내지 이원화하고 가야할 단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 구속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친구의 책상을 발로 걷어차며 짜증을 내던 도덕 선생님을 우리가 한심하게 여겼던 것처럼, “언제나 착한 것, 선한 것” 이 도덕이 지향하는 단 하나의 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화학을 전공한 아내가 결혼 후에 늦게라도 이 영역을 공부하겠다고 <윤리와 사상>이라는 사회탐구 선택과목 교재를 사서 몇 장 읽어보더니 자신이 생각한 윤리와 다르고 생각보다 어렵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요즘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윤리와 사상은 우리가 어렸을 때 배우던 바른생활과 도덕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사상서에 가까웠다. 이런 것은 해도 되고 이런 것은 하면 안 된다는 훈육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배우면 충분하다는 점 때문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무용하며 이제는 대학 입시를 위한 실용적인 배움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쳐지지 않는 것일까 ……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기 전 나는 윤리라는 단어를 오래도록 곱씹어 볼 수 밖에 없었다. 얼마 전 읽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처럼 착하게 살아라, 선하게 살아라, 폐를 끼치지 말아라, 너의 본분을 다하라는 정언명령의 딱딱한 집합체일까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10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1권 <인간에게 “좋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이 책이 다름아니라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고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살아가며 모든 행위에서 좋음을 추구하는데 여러가지 유형의 다양한 좋음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최고의 좋음은 행복이며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은 “이게 옳은 거야? 옳지 않은 거야?” 와 같은 선악 개념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거야? 아니면 나쁜 거야?” 라는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에, 윤리를 당위와 의무가 아니라 좋은 것과 즐거운 것과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좋은 것은 본성에 부합하므로 즐겁고 행복한 것임은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모자라거나 지나치지 않는 알맞은 길(적도:適度), 즉 <중용>의 행위를 실천하다보면 그에 부합하는 성품이 우리에게 갖추어질 것이며, 정의와 사랑 위에서 지성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행복” 이라고 말한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향한 길이라는 점을 떠올리다보니 두 사람이 생각났다.
A는 내가 MBA를 오기 전 회사에서 꽤 오래도록 CEO로 모셨던 분이었다. 15년 동안 모회사와 자회사를 옮겨 다니며 부서를 이동하는 바람에 한 명의 CEO 밑에 오래 일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A는 내가 수 년 동안 직-간접적으로 옆에서 같이 일하고 접했던 유일한 CEO였다. A에 대한 세간의 평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무색무취하며 자신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고 늘 좋은 사람의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점이었다. A에게 어떤 사안을 보고하기 위해 다같이 CEO 집무실을 찾으면, A는 CEO로서 이렇게 하라고 딱부러지게 결정하는 법이 없었고 늘 신중했다. A말고 다른 임원 중에는 매우 결단력이 높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고 과감한 리더들이 몇 명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런 리더와 A를 비교하며 A가 CEO로서 어떤 장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뒤에서 수근거리곤 했다.
나는 A가 싫지 않았다. A는 비록 느리고 신중했지만 격노하지 않았고 (그도 인간인지라 가끔 짜증을 낼 때가 있었지만) 입버릇처럼 회사에서 일하는 것 못지 않게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참 좋게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행복을 강조하던 A의 말을 반은 진지하게 나머지 반은 흘려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 이면에는 ‘나는 일만 하는 CEO가 아니에요’ 라는 점을 직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사실은 누구보다 일만 하는 사람일텐데 ……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20년 초 Pandemic이 시작되었고 회사의 많은 기능이 멈추고 느려지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거의 모두가 재택근무를 하였는데 그 해 여름 그룹 전체적으로 모든 CEO에게 어떤 미션이 내려졌다. 마침 그룹에서 Pandemic에도 직원의 교육에 도움이 되도록 온라인 학습 플랫폼을 개설했는데 여기에 실릴 영상을 모든 CEO가 하나씩 촬영해서 제출하라는 미션이었다. CEO들은 전략, 재무, 조직, 사업개발 등 경영에 필요한 여러 키워드 중 하나를 선택해서 1인 강의, 인터뷰, 집단 토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영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A가 고심 끝에 선택한 키워드는 의외로 <행복>이었다. <행복> 이라는 단어가 CEO의 미션 키워드 중 하나로 있었다는 점도 신선했지만 이를 직접 강의로 제작하겠다고 결심한 A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때 경영기획실에 있던 내가 그 강의자료를 작성하는 실무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어떻게 만들어야하나 고민을 하고있을 때 A가 먼저 우리에게 찾아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스토리가 있으니 며칠 기다려보라’고 했다. 며칠 뒤 다시 집무실을 찾자 A4 용지 몇 장에 빼곡하게 강의내용을 적은 자료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는 무엇인지, 어떻게 행복을 찾아 나서야 하는지를 3시간에 걸쳐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그건 단순히 A 본인이 서양과 동양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에 대한 개념을 많이 알고 있다고 지식을 자랑하는 내용이 아니었고, 본인 나름대로 60년 가까이 살아오며 또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며 느끼고 경험한 행복이라는 주제를 솔직하게 정리하는 편에 가까웠다.
나는 A가 직접 작성한 A4 몇 장을 기초로 강의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앞 뒤 살을 붙이다 보니 파워포인트로 70페이지에 가까운 강의자료가 만들어졌다. <행복에 이르는 다섯 계단> 이라는 제목의 자료였다. 당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트롯 시즌1의 우승자 임영웅이 <바램> 미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배경으로 <행복의 영웅이 되자, 행복한 영웅이 되자> 라는 문구를 보여주며 강의자료를 마무리했다. 일주일 동안 밤을 새며 행복이라는 주제를 계속 들여다보는 과정은 솔직히 너무 ‘행복’했다. 회사에서 CEO로 만난 A가 전략과 사업개발이 아닌 인간의 고유한 고민거리인 행복에 대해 이렇게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에 놀라웠고, 다양한 서양철학사와 개념과 이론에서 정의하는 행복의 개념을 공부하는 것은 즐거웠고, 그것을 알게되는 과정은 유익했고, 그 끝은 나 역시 행복하다는 느낌이었다.
강의 영상 녹화가 끝나고 그룹 플랫폼에 무사히 업로드하고 나서 그 해 가을에 A는 몇 명 직원들을 모아 부부동반으로 저녁식사를 제안했고 나와 아내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식사자리에 참여했다. A도 아내 (우리는 사모님이라고 불렀던) 를 데리고 나왔는데 5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긴 생머리에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화를 하셨던 그분을 보며 나와 아내는 꼭 데미무어 같다고 뒤에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A와 아내는 회사 이외의 시간을 둘이서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주었는데 가령 주말에 날씨가 좋을 때면 집 근처 큰 공원에 와인과 간단한 먹을 것을 들고가서 부부가 와인 한 잔 하며 오후 햇살을 즐기고 오는데 그것이 몹시 행복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저녁식사에서 A와 아내가 해주셨던 이야기가 평소 A가 우리에게 간헐적으로 하였던 행복, 인생의 의미, 중도를 지키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A가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이유는 물론 그의 <행복> 강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강의자료를 제작하며 나 역시 행복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중용> 이라는 것을 보여준 이가 어쩌면 A이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A가 신중했던 이유는 재무 출신이기 때문에 중대한 사항에 있어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비교적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었겠지만, 모자라거나 치우친 것 없이 가장 중간의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했던 것 아니었을까, A가 보여주었던 온화한 모습은 쉽게 격노하고 또는 포퓰리즘적인 사내 정책으로 직원의 마음을 사려는 쉬운 모습에서 벗어나 중간의 길을 걸어가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A의 언행을 <중용>으로 다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기억이 더 난다.
내가 A 밑에서 일하던 당시에 A는 과거 그룹의 어떤 의사결정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수시로 변호사들과 방어 논리를 고민하고 꽤 자주 재판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러한 개인적인 일정에도 불구하고 A는 단 한번도 그러한 지난한 과정의 피곤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았고 어떤 사안을 보고하는 일정에서는 그 사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뿐, 재판 준비와 관련해 특별한 감정의 변화를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그 날 오후 재판이 있어 법원에 가야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재판을 몇 시간 앞둔 시점에도 보고를 끝까지 받는 것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회사에서 크게 치우쳐짐 없이 알맞은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던 모습,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이야기하던 모습,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MBA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기 위해 집무실을 찾았을 때에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인생을 즐겁게 살라는 이야기를 해주던 모습. 그런 것들이 A를 생각하면 떠오른다. A가 다른 CEO와 달리 5년이나 같은 자리에서 그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것,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도 그가 보여주었던 <중용>의 태도 때문 아니었을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대로 삶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그에 도달하기 위해 중용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던 것 아닐까 ……
조금 더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니코마코스 윤리학> 7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으로 향하는 ‘즐거움’을 위해서는 결함(kakia), 자제력 없음(akrasia), 짐승같은 품성상태(theriotes) 이 셋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짐승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나는 자동적으로 B를 떠올렸다. B는 대학 입학 이후에 사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여자였다. B는 S 대학의 문과대학을 다니던 친구였는데 의외로 연극 연출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연극 동아리에서 직접 연출을 하며 자신은 이쪽으로 직업을 갖겠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 번은 B가 연출한 연극을 직접 보러가기도 했는데, 나는 경영학을 배우면서 주변에 영화나 연극과 같은 예술 방면의 길을 걸어가는 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분야를 경제적 밥벌이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B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영화 속 대사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나오는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였다. 주인공 경수 (김상경 분)가 영화 내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B가 어떤 의미에서 저 대사가 좋다고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제대로 그 이유를 듣지 못했지만, 나도 가끔 저 대사를 읊조리면서 괴물은 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20년 전의 홍상수는 그 자체로 키치했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B의 근황이 궁금했다.
연극 연출을 꿈꿨던 B가 그 업계에서 직업을 갖진 않고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분야에서 종사하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B가 만들었다는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고 크게 호평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B의 근황을 찾아보니, 몇 년 전에 B가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그 때문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고 지금도 여전히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며 만났던 다양한 사람 중에 가장 자신의 꿈이 확고하고 진취적이었고 삶에 고민이 많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B가 자신이 꿈꾸던대로 직업을 갖게 되었던 점은 다행이었지만, 현재는 다소 수난을 겪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했다. B는 “우리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사람은 못 되고 괴물이 된 것일까, 사람과 괴물의 사이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래도 다행히 사람에 가깝게 있는 것일까?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중용의 단어 위에서 B를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항상 내 이름에 ‘친구’라는 단어를 붙여 OO친구라고 나를 불러주었던 B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알맞게 걸어가고 있는지 궁금했고 사실은 계속 응원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가운데에 존재하고 여기에서 위로 상승한 것이 신의 존재이며 또는 부족하여 하강한 것이 짐승의 존재이다. 즉 우리는 신은 될 수 없고 짐승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를 도모해가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 속 저 대사는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신의 위치에 사람이 있고, 짐승의 위치에 괴물이 있다. 그러니까 과한 것의 상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한 단계 후퇴한 것이고, 저 영화 속 경수가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괴물의 그 사이 어딘가이다. 홍상수 감독은 괴물처럼 살지 말자고 이야기했다기 보다는, 이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지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마저 쉽지 않은 세상이 되고 있음을 짚어낸 것 아닐까 싶다. 저 대사가 우리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한 것이라면 점점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라는 것은 좁아지고 여유가 없어지고 자꾸만 짐승과 괴물에 맞닿을 정도로 낭떠러지에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점점 사람보다는 괴물과 짐승에 가까워지는 것이 맞다면, 어린 시절에 배웠던 도덕과 윤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것은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닐 것 같다. 왼쪽과 오른쪽 양 극단만이 옳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운데 길이 점점 좁아지고 이내 희미해지기 때문에, 가운데의 알맞은 적도(適度)를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삶의 목적과 지혜를 경시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도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Justice>, <What Money Can't Buy> 책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이유도, 그가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과 공동체 정신을 옹호하는 철학자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래퍼가 되기 전에 인간부터 되고 오라고 했던 <공중도덕>, 급히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게 나인지 잊어가기 때문에 멈춰야겠으면 지금 멈추라고 했던 <독>이 인기를 얻었던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그래도 아직은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책을 다 읽고나자 모자라거나 과하지 않고 중간을 지향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미덕의 한 모습이라는 확인이 들었다. 점점 극단의 한 의견만이 옳다고 여겨지고 상대와 나를 악과 선으로 재단하려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신도 언감생심, 사람의 지위도 간신히 지켜낼 뿐이며 꽤 쉽게 괴물에 가까워진다. 쉽지 않은 사회 생활, 직장 생활에서 나를 잃지 않고도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했는지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것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