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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Dec 06. 2023

#1 0.15%의 어떤 것 [담엔 뭐 읽지?]

담엔 뭐 읽지 ? - 프롤로그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파울 첼란

 




시간을 2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21년 한 해 동안 나는 111권의 책을 읽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첫 날로 넘어가던 새벽, 미셸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 (웅진지식하우스, 2018)을 읽으며 시작된 책 읽기는 10월 5일 한강 작가의 신간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를 100번째 책으로 읽으며 한 번 일단락 되었다. 100권 정도 읽었으니 남은 두 달은 영화나 보며 책은 잊고 쉬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정도 활자를 아예 읽지 않으니 뭐라도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달 반 동안 열 한 권의 책을 마저 읽고 나니 111 이라는 숫자가 남았다.


한 해에 111권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문화체육관광부가 2022년 1월 14일에 발표한 <2021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지난 1년 간 대한민국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을 기록했다고 했다. 이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의 연간 종합독서량 34.4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데, 책을 읽는 성인은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다. 1년에 4.5권의 책을 읽은 누군가에 비해 나는 스물 다섯 배 많은 111권의 책을 읽은 셈이다. 어떤 의미로는 ‘성실한 괴물’에 가까웠다.


1년에 100권의 책을 읽어보자는, 무엇보다도 100권의 인문학 책을 읽어보자는 결심은 내가 스물 여덟이던 2012년 시작되었다. 여러 차례 여러 경로를 통해 왜 이런 독서를 시작했는지 밝혔지만 그 기원은 실로 단순했다. 회사에서 내가 속한 조직의 임원이 2021년 연말 송년회에서 누군가 책 100권을 읽으면 100만원을 상금으로 주겠다는 농담을 건넸는데, 나는 그걸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다음 해부터 한 번 해보기로 했다. 밀란 쿤데라가 맞았다. 누군가의 농담 한 마디로, 나는 책의 세계로 축출되었고 이 괴물 같은 여정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12년째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억난다. 2012년 새해를 맞아 집에 있던 아무 책이나 읽기 시작했는데 마침 그것이 수(數)에 관련한 책이었다. 영국의 수학자 알렉스 벨로스가 쓴 <신기한 수학 나라의 알렉스> 라는 책이었다. 또 기억난다. 500쪽 가까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이 책 다음에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거다. 며칠을 끙끙대다가 지금 읽던 책이 한국 작가가 모어로 쓴 책이 아니라 외서를 번역한 책이라는 점에서 번역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찾아봤다. 그러다가 이희재 작가의 <번역의 탄생> 이라는 책을 두 번째 책으로 집어 들었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늘 가까스로 다음 책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그 발걸음은 고단하고 힘들고 외로웠다.


2012년 1월 1일에 읽었던, 1년에 100권의 책 읽기의 시작.


2021년, 1부터 111로 향하는 여정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어 행복했다 거나, 다른 것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활자의 황홀함으로 가득했다…… 라고 간단히 이야기할 수만은 없었다.


2021년은 2010년부터 시작된 직장 생활 12년차였다. 12년차 직장인의 일상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오래 머물렀던 조직에서 새로운 조직으로 이동한 첫 해였는데, 새로 이동한 조직에서 다루는 업무 또한 회사에서 거의 처음 시도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참고할 수 있는 전례가 없었고 때문에 자유로웠지만 덕분에 불안함도 많았다.


새로운 조직. 새로운 업무 중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야근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하루 8시간의 일과 시간 중에 한 눈을 팔지 않고 일을 했고, 마감을 했고, 늦지 않게 회사를 떠났다. 늦지 않게 집에 돌아와 저녁이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30대 후반의 24시간 중에 나를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온전한 여유는 생각보다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고단한 하루 일과 속 활자를 읽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부단히 시간을 만들어내야 했다. 출근 길 지하철에서. 다시 또 퇴근 길 지하철에서. 앉거나 혹은 서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재우고 내가 잠들기 전 밤에 잠깐. 점심을 일찍 먹은 날이면 빈 회의실을 찾아 또 잠깐. 주말이면 7살 아이가 혼자 노는 시간을 틈타 30분 정도 잠깐.


정규시간의 여집합, 또는 잠깐의 합집합을 긁어모아 간신히 만든 시간으로 111권의 책과 41,514 페이지를 읽어낸 셈이다. 나는 혼신의 마음으로 정해진 대상도 없이 막연한 누군가와 싸우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냈다.


누군가와 싸우는 기분 …… 1년에 100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 평균적으로 3일에 한 권씩을 읽어내야 했다. 이 대목에서 읽다 라는 동사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건 가까스로 읽어내야 했던 것에 가까웠다. 3일에 한 권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두고, 주변의 많은 이들은 내게 놀랍다는 반응과 역시라는 반응을 모두 보였다. 세 달에 한 권 읽기도 힘든데, 삼 일에 한 권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나라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는 편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러한 독서 분량이 크게 놀랍진 않고 역시 그랬구나, 라는 덤덤한 반응이 함께 전해졌다. 역시라니, 누군가와 싸우듯이 가까스로 읽어내야 했던 치열한 고뇌는 혼자 기억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이었다.


주변의 그러한 주관적인 반응, 그리고 어쨌든 2021년에도 1년에 10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 기뻤던가? 만족스러웠던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쉬지 않고 뭔가를 계속 읽었다는 잠시의 자기 만족감은 내려 두고 서점에 가 보자. 이왕이면 매주 정해진 요일을 정해서 일주일마다 서점에 가보면 아마 당신 눈에도 이런 것들이 보일 것이다. 세상에는 참 많은 책이 존재하고 정말 많은 책이 매주 새롭게 시장에 쏟아진다는 것을. 지난 주에 신간 도서 코너에서 보였던 책 중 일부는 다음 주에 서점에 갔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고, 새로운 책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음을. 그러므로 새롭게 선보인 어떤 책이 독자의 눈을 사로잡고 본연의 목적인 판매와 독서로 이어질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그리 많지 않음을. 서점을 종종 찾으면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된다.


대한출판문화협회와 출판유통진흥원의 통계를 종합해보면, 국내 매년 약 64,000종에서 65,000종의 신간이 발행된다. 매년 그 정도의 새로운 책이 쏟아지는 것이니 5년만 시간이 흘러도 30만종이 넘는 책이 세상에 흘러 다니는 셈이다. 그러니까 내가 1년에 아주 가까스로 읽은 100권의 책이라는 것은…… 매년 새롭게 출간되는 책 65,000권에 비하면 0.15%에 불과한 아주 미미한 존재였다. 책을 읽은 것이 기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0.15%라는 숫자는, 높이기는 어렵지만 낮아지기는 너무나도 손쉬운 연약한 지표에 불과했다. 역시 통계에 따르면 2022년 한 해에는 61,181종의 책이 새로 발행되었다. 전년에 비해 약 3,000종가량 감소한 수치지만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새로운 책이 매년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반면 2022년에 나는 40권의 책을 읽는 데 그쳤다. 사실 책을 읽어 나가는 속도는 예전의 그것과 비슷했다. 폴 데이비스가 쓴 <침묵하는 우주>를 시작으로 5월 중순까지 40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대로라면 연말 무렵에 100권의 책을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2022년 나의 독서 여정은 5월 22일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멈추고 말았는데, 5월 말에 회사에서 해외 연수 대상자로 선발되어 약 1년 동안은 유학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읽는 사람에서 문제 푸는 사람으로, 지혜를 구하는 인문학에서 GMAT이니 TOFEL이니 지식과 실력을 가늠하는 영역으로 활자와 관련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분자는 40. 분모는 61,181. 0.15%의 확률은 0.07%의 희박한 수준이 되었는데… 아, 사람은 이다지도 흔들리기 쉬운 존재이며, 연약하며, 미시의 영역에서 나쁘지 않은 것도 거시의 영역에서 보면 티끌만한 존재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2021년 읽은 111권의 책. 그리고 111권의 책이 만들어 낸 0.15%의 값. 이 0.15%라는 값을 1.5%, 15%로 높이고 싶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111권이라는 자기 만족스러운 숫자와 0.15%라는 겸손해지는 비율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고, 111권을 읽은 것에 만족하기에는 나를 둘러싼 책의 우주가 더 빠른 속도로 내게서 멀어지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나의 존재는 작았고 우주는 계속 넓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책을 읽어 기쁘기 보다는, 내가 읽지 못한 책에 시선을 돌리며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해 똑 같은 3일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을 때, 내가 선택한 책은 과연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책보다 더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인지, 만약 가치가 없는 책을 읽고 났을 때 나의 3일은 다른 책에 대한 기회 손실이 되어 의미없이 흘러가 버린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이 책의 가치에 대해 나는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년에 100권의 책을 읽는 과정은 끊임없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100권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사나흘에 한 권을 읽는 정도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 강박,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선택되지 않은 책보다 더 읽을만한 지혜, 사상, 문장이 담겨있는지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또 좋은 책을 찾아 읽을 지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다. 책이라는 우주를 여행하는 과정은 매우 불연속적이라서, 오늘 비록 좋은 책을 읽는 행운이 깃든다 해도 그것이 이 다음 역시 좋은 책을 읽을 것이라는 미래를 담보하지 못했다. 괴로웠다.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책을 읽는 오늘의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자기 강박, 의심, 불안함은 결국 좋은 책을 만나고 읽고 느끼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들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경험한 것과 같이 욕심은 결코 100% 충족되지 않는 법이라,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을 보며 나는 계속 괴로워했다. 그건 영원히 고통받는 시시포스의 굴레와도 같았다. 이런 식이다. 인터넷으로 서점 홈페이지에 들어가 요즘 출간된 신간, 편집자가 추천하는 우수한 책, 몇 주 간의 베스트셀러를 꼼꼼히 검색하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책을 10권 정도 고른다.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좋은 책으로 추정되는 10권의 책 목록을 보면 배부른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바로 구매 버튼을 누르는 것은 아니다. 대형 서점에 가서 괜찮다고 생각한 책이 실제로도 괜찮은 지, 사서 읽어 볼만한 책인지 직접 알아본다. 표지의 세련됨, 책 두께의 적당함, 자간과 문단 나눔의 편안한 정도, 책 내용의 충실함과 더불어 책의 물질적, 외형적인 것 역시 나에게 있어 좋은 책으로 다가오는지를 살핀다.


그런 탐색을 거치고 나면 애초 10권 정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중 실제로도 괜찮은 책은 거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권의 책을 꼼꼼하게 살필 필요도 없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것인지 아닌지는 보통 첫 30초 안에 결론이 났다. 좋은 책일 것이란 예단은 막상 현실에선 틀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좋은 책을 만나고 싶지만 그런 쉽게 책을 만나기 어렵다는 현실이 너무나 괴로웠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만 더 깊어졌다.




좋은 책에 대한 욕심. 좋은 책은 과연 어떤 책일까? 그건 이 세상 79억 인구 중 어느 누가 읽어도 절대적으로 좋은 책이 있음을 의미하진 않았다. 물리학으로 따져보면 좋은 책이란 불변의 고정된 법칙으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는 뉴턴의 고전 물리학보다는, 모든 사물의 존재는 일정한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양자 역학에 가까운 법이었다. 확률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직접 마주하지 않고서는 이 책이 좋은 책인지 아닌지 섣불리 예단할 수가 없다.


모든 책은 그 나름대로 좋은 책이 될 질료를 가지고 태어난다. 절대적으로 가치가 부족한 책, 또는 정반대로 다수가 읽어도 그 가치를 발견하고 인정할만한 책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책은 어떤 사람이 읽었을 때 비로소 그 쓰임을 다하는 고유의 주파수가 있다고 믿는다. 당신은 싫어할지라도 나는 그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적인 관계가 있는 거다.


나와 주파수가 일치하는 책을 만날 확률, 그 희박한 확률에 나는 불안하고 괴로워하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그 얄팍한 확률에 무수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박세미 시인이 내가 나일 확률을 고민하는 것처럼, 나는 이 책이 좋은 책일 확률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앞서의 말을 좀 더 정확히 고쳐보자. 나는 나의 성향, 사상과 주파수가 맞는, 책을 읽는 오늘도 즐겁지만, 미래의 나 역시 좀 더 깊고 넓어질 수 있는 그 책을 만날 확률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다시 한번 정확한 언어로 말해보자. 시장에 쏟아지는 수많은 책 중에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겠다는 부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읽을 수 있는 독서의 부피는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진 못할 터였다. 부피가 아니라 밀도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나라는 고유한 육체와 정신에 감응하여 무지와 허무를 지혜와 사유로 가득 채우고 싶다는, 밀도의 확률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2021년에 좋은 책을 만난 확률은 아마 0.15% 보다도 낮을 것이다. 내가 읽은 111권의 책이 모두 나에게 좋은 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권 한 권 돌아보았을 때 111권 모두 나를 흔들어 성장시킨 좋은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를 흔들어 성장시킬 책이라며 품었던 믿음이, 책이 끝나갈 무렵 보기 좋게 배반당하는 경우가 사실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조차 없다면, 나는 0.15%보다도 낮은 확률로 가까스로 만난 감응을 거의 놓쳐버렸을 거다. 가까스로 노력해도 이 정도 밖에 안된다면, 그래도 가까스로 노력하는 편이 손을 놓아버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앞으로의 이 글은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한 확률을 어떻게든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지난 10년 동안의 분투기다. 앞서 나는 누군가와 싸우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고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누군가 란 결국 나 자신을 의미했다. 그냥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버리는 나, 적당히 감흥을 주는 책을 발견한 것에 쉽게 안도하며 더 나은 책 탐색을 멈추어 버리는 나, 적당한 내가 되지 않기 위한 싸움이었던 거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주파수와 공명(共鳴)하며 자신을 흔들어 성장시키는 좋은 책이 있다.


그리고 그 책을 분명 만날 수 있다.

 

자 이제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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