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엔 뭐 읽지? - 네 번째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취미가 같으면 좋겠대
난 어떤가 물었더니 미안하지만 자기 취향이 아니라 하네
- <취미는 사랑> 中, 가을방학 노래
1년 전 여름, 거실에 있던 TV를 처분하고 그 자리에 책장을 두었다.
여타 일반적인 가정과 마찬가지로 10년 전 결혼할 때부터 거실의 가구 배치는 지극히 평범했다. 벽면 한 켠에 신혼살림으로 구입한 55인치 TV가 있고 그 반대편에 패브릭 소파가 있다. 패브릭 소파 앞에 작은 협탁이 있던 적도 있었고 바닥에 러그가 깔려 있던 적도 있었지만 TV와 소파가 마주본 형태만큼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그것에 조금 변화를 둬볼까 싶은 건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2021년이었는데, 아이가 더 편하게 책을 꺼내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이가 자는 방에는 정확히 세보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400권에서 500권의 그림책이 꽂혀 있는데, 방은 작고 거실은 넓어 보통 읽을 책을 꺼낸 뒤 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읽는 편이 많았다. 아이가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불편해 보였고 아내와 나는 주중에 TV를 거의 보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에 TV는 방치되어 잠들어 있었다. 아이와 우리 부부의 교집합이 생기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결심을 했다. 거실에서 TV를, 아니 이 집에서 TV를 없애자고 말이다. 처음에는 주말에 한 시간이라도 방송을 보는 것이 있으니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나중에 다시 사더라도 과감히 없애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신혼살림으로 장만했던 55인치 TV는 10년만에 처분되어 집에서 사라졌고, 부엌에 있던 큰 식탁이 대신 거실 한 편으로 옮겨졌다. 인터넷으로 책장 두 개를 새로 주문하여 원래 TV가 있던 자리에 두었다. 며칠 전까지 TV와 소파가 마주보던 자리에는,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책상 역할도 하는 식탁, 이렇게 두 가구가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모든 가구 정리를 끝낸 날 아내와 나는 거실 창문을 활짝 열고 오래도록 환기를 했다. 거창한 의도는 없었지만 …… 남들이 가끔 인터넷에 검색해본다는 서재 같은 거실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새로운 책장이 생겨서 신난 건 아이 뿐만 아니라 나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있던 그림책을 거실로 가져올 뿐만 아니라 나와 아내가 주로 이용하는 서재의 책장에 꽂힌 책도 일부는 거실 책장으로 꺼내 옮기자고 했다. 아내는 주로 예술 서적과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두었다. 나는 민음사, 문학동네, 범우사, 창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고전문학 작품을 골라 거실로 옮겨 두었다. 그 즈음의 나는 한창 고전문학을 읽던 터라 그것들을 좀 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싶었다.
책을 옮기고 나자 서재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 여유가 생겼다. 책장 군데 군데 벽이 보인다. 이 참에 책장 구역마다 일정한 테마를 정해서 제대로 책을 분류해 두자는 마음이 들었다. 장갑을 끼고 책을 모두 꺼내자 조금은 지친다. 지식인의 서재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책이 이렇게 많았던가 …… 그렇게 꺼내어진 책을 나름의 기호에 맞게 다시 배치한다. 예술과 인문에 대한 책은 왼쪽 책장에, 가운데는 과학과 에세이, 오른쪽 책장에는 주로 아내가 읽는 사회, 역사에 대한 책을 놓는다. 정리를 마치고 나서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살짝 허망한 마음이 든다. 책장만 보고도 어떤 취향의 책을 읽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면 했는데, 새롭게 배치를 했음에도 어떤 기준에 따라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의 서재 책장을 보고서, 아 이 사람은 이런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구나, 이 사람은 이런 취향에 맞게 책을 읽는구나…… 라고 말없이 느껴지길 바랬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의 책장은 두서가 없었다. 그건 책을 정리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구입하고 읽은 책을 한 자리에 모아보니 일정한 지향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모래 성처럼 간신히 집합되어 있을 뿐이었다. 책을 고르고 구입할 때마다 치열하게 고뇌한 것은 분명 사실인데, 그 고뇌의 흔적이라는 것이 나의 어떠한 것도 증명하거나 대리하지 못한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취향의 부재가 다소 슬프기도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운영하는 이용자 게시판, 여러 사이트에서 운영하는 독서 관련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유형의 책 인증 글을 발견하게 된다. “휴… 홧김에 지른 책 20권 인증입니다”, “3월의 책 구매 목록입니다” 제목을 클릭해서 들어가보면 오랜만에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는 글과 함께 그가 구입한 책 여러 권의 사진이 함께 첨부되어 있다. 어떤 책을 구입했는지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어떤 맥락에서 이 책을 사게 되었는지 약간의 설명이 덧붙여진 글은 더욱 즐겁다.
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비정근> 이란 책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그가 초기에 쓴 작품을 중고 서점에서 간신히 구했다는 글, 요즘 종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데 그 중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기독교의 역사>, 톰 홀랜드의 <도미니언> 두 권을 샀다는 글, 자신이 어떤 책을 새롭게 구매했다는 글을 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 첨부된 구매 인증 사진이 세련된 것도 아니다. 무심하게 핸드폰으로 찍어 올린 사진이라 크기도 구도도 제멋대로지만, 나와 같은 시간에 살며 책을 읽는 무수한 타인들이 지금 어떤 책을 어떤 이유에서 구매하는지, 책을 소비하는 동시대성이라는 이상한 감정에 감탄할 때가 있다.
인생책을 인증하는 글 역시 즐겁다. 인생책은 여러가지를 의미한다. 단 한 번 읽었지만 자신의 삶을 바꾼 변곡점의 책일 수도 있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어도 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도 인생책이 될 수 있다. 인생책, 이라고 입력하고 검색해보면 …… 인생책 있으신가요? 너희는 인생책 뭐임? 인생책 뭐야? 다들 인생책 공유해보자, 이런 글이 여럿 나온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이런 책이 자신의 인생책이라고 그들은 이야기한다.
대개 인생책은 고전문학인 경우가 많다. 그들 고전문학은 짧게는 수 십 년, 길게는 수 백 년에 걸쳐 생명력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그 질긴 생명력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인생 또한 치명적으로 바꿔 놓을 만한 힘이 있는 거다. 누군가의 인생과 책의 생명이 교환되는 셈이다.
간혹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 인생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책이 인생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면 그를 비판하는 댓글도 부지기수로 달린다. 괜히 있어 보이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닌지, 순수 이성 비판을 정말 읽어보긴 한 것이냐며 저의를 의심하는 댓글이 많다. 순수 이성 비판이 인생책이라는 말에 쉽게 동의하긴 어렵지만, 동시에 그것을 간단히 허세, 거짓말로 치부하긴 어렵다. 살면서 누군가는 정말로 칸트가 말하는 정언 명령에 삶의 전환점을 경험할 수도 있으므로. 우리의 인생이 저마다 다르듯이 우리의 인생책 또한 저마다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즐겁다.
당신들이 오늘 구입한 책 몇 권. 당신들의 삶을 결정지은 인생책 몇 권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겁다. 그런데 동시에 그 몇 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이 추천하는 그 몇 권이 나에게 다가와 내 삶을 흔들어 놓기엔, 서로의 취향이 겹쳐질 확률은 너무나도 낮은 법이다. 수많은 당신들이 각자 내게 다가와 자신의 삶을 규정 지은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가면의 고백>, <죄와 벌>, <토지>, <레미제라블> 이런 책이라 말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런 책들을 읽었을 때 너무 흥분되었으니 당신도 그 흥분을 경험해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몇 권의 책은 하나의 점에 가깝다. 점만으로 우리가 같은 취향을 가질 것으로 판단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법이다. 각자의 책은 각자의 삶이라는 우주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점인데 정작 그 점이 다른 이의 삶 속에서도 빛날 것이라는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누군가의 인생책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책으로 스쳐 지나갈 확률이 더 높다. 때문에 누군가의 인생책을 들여다보는 것은 즐겁지만 그 즐거움만으로는 그들의 인생책이 나의 인생책으로 전이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과 나의 인생이 겹쳐지기란 쉽지 않다.
내게 필요한 것은 몇 개의 점이 아니라 점이 모인 선, 아니 몇 개의 선이 복잡하게 얽힌 넓은 면이었다. 나는 점이 아닌 면의 책이 필요했다. 몇 권의 인생책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면으로 보여줄 수 있는 너른 광장이 더 절실했다. 그의 인생, 취향, 정서, 가치관을 아주 잠깐이라도 들여다보기 위해선 더 많은 책이 필요했다.
타인의 책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최근에 발견한 어떤 이가 있다. 자신이 오늘 구입한 책, 인생책을 알려주는 것과 같이 자신의 책장을 사진으로 찍어 무심하게 공유하는 글이 가끔 올라오는데, 그도 자신의 책장을 솔직하게 알린 여럿 중 한 사람이었다. 책장 한 칸마다 한 장씩 사진을 찍어 올리는데 나는 그의 책장을 들여다보고는 겉잡을 수 없는 여러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이성복, 최승자, 김수영, 수전 손택, 존 버거, 카프카, 까뮈, 밀란 쿤데라,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샤르트르를 좋아한다고 했다. 첫 번째 책장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성복 시인과 최승자 시인의 작품 여럿과 그들의 산문집, 시론학 등이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두 번째 책장에는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우울한 열정>과 같은 수전 손택의 책과 열화당 출판사에서 펴낸 존 버거의 작품들이 보인다. 아,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정도는 나도 한 번 읽어 보았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몇 권을 소장하고 있는 것인지. 이어 세 번째 책장에는 범우사 출판사에서 박환덕 번역가가 펴낸 카프카 시리즈가 있고 그 옆에는 신형철 평론가의 산문집도 여럿 보인다. 이어, 네 번째 책장에는 ……
나는 그의 책장이 부러웠고 그의 책장을 갖고 싶었고 그가 가진 독서의 취향과 삶의 정서를 닮고 싶어졌다. 내가 말한 그의 취향, 정서라는 것은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실제로 인생의 어떠한 경로를 밟고 있는지 나는 조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그의 책장을 통해 책이 말없이 건네는 무언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동경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군인지 모른다.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지은 그 한 권의 책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가 가진 책장의 단정한 외형, 책장에 놓인 이성복, 최승자, 존 버거, 수전 손택, 카프가와 같은 여러 작가의, 삶과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고민이라는 공통적인 경향, 어떤 작가가 펴낸 모든 책을 모아 소장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애정, 열화당, 마음산책, 범우사, 문학과지성사와 같이 서로 결이 비슷한 출판사들의 집합, 그런 것들에 비춰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익명의 취향을 경험할 뿐이다. 책 한 권, 몇 권이 아니라 그가 가진 책장 전체를 훔쳐보는 것은 누군가가 가진 책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점이 아닌 선, 선이 아닌 면으로.
담엔 뭐 읽지? 네 번째 법칙은 누군가의 책장을 엿보는 거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았을 때 허락을 받고 그 집의 책장에는 어떤 책이 있는지 살피는 것도 좋다. 지인이 살고 있는 가정집이 아니어도 좋다. 카페 겸 서점을 겸하는 공간에 놓인 책장에도 그 주인이 지향하는 정서가 담겨있을 수 있다. 직접 어딘가를 찾아가기 어렵다면 나처럼 인터넷 게시판에서 책장을 인증하는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르는 사람의 책장이어도 그만이다. 중요한 것은 책장에 담긴 그 사람만의 독창적인 취향, 삶의 패턴, 가치관의 정서를 눈으로 느끼고 약간의 상상을 더해 경험하는 것이다. 타인의 취향이라는 것을.
취향과 정서에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떤 이의 책장은 민음사나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으로만 가득한 경우도 있다. 또 어떤 이의 책장은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전집> 이나 한길사 <그레이트 북스> 처럼 인문 고전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수도 있다. 어떤 책장은 쉬워 보이고 어떤 책장은 어려워 보인다. 중요한 것은 쉽고 어려움이 아니다. 세심하게 따져야 할 것은 그 책장이 내 것이기를 바라는지, 책장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이다. 내가 살아가는 경향과 낯선 이의 책장에서 느껴지는 취향이 비교적 일치할 수 있겠는지 그 확률을 조심스럽게 따져보는 것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의 책장을 만날 때면 나의 지평은 손쉽게 넓게 확장된다. 비록 내가 몰랐던 작가이지만 한 번이라도 접하면 기꺼이 그 작가에 매료될 것은 분명하기에, 그의 책장에 놓인 그 작가를 향해 나의 세계는 한 걸음 확장된다. 꼭 나의 취향과 백퍼센트 일치하지 않아도 좋다. 타인의 취향을 경험하며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작가를 지금까진 읽어보진 않았고 감히 읽으려는 시도를 해 보진 않았는데, 어라 이 사람의 책장을 보니 그 작가를 읽어보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겠네, 라는 생각을 속으로 조곤조곤 하게 될 것이다. 조금은 속는 셈 치고, 그의 취향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에 속아주는 것도 좋다. 그렇게 반쯤 용기 내어 내 딛은 한 걸음은 나를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지점으로 데려다 줄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발견한 낯선 이의 책장을 엿보고 나는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언젠가 한 번은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이성복 시인의 <고백의 형식들>, 최승자 시인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카프카의 소설 <성> 등이었다. 모두 그의 책장에서 발견한 책, 조금은 닮아보고 싶은 낯선 이의 취향이었다.
가장 미묘하게 흥분되는 지점은 바로 이 시간이다. 당신의 책장에서 발견한 책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당신의 책장에서 발견한 그 독특한 취향에 더 가까워질 것이라 생각되는 기대감. 이 기대감이 나를 들뜨게 하지만 동시에 책을 열어 표지를 지나 한 두 페이지 읽는 순간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뀔 수도 있고 또는 나의 새로운 취향으로 각인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미묘하게 흥분이 된다. 어떤 의미로 내 손에 쥐고 있는 몇 권의 책은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나를 황홀하게 한 것은, 내 것으로 갈취하고 싶다는 타인의 취향을 만난 그 자체다. 머리 속에서 멋대로 상상하여 만들어낸 타인의 취향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은 진실과는 무관하게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며 그것에 기대어 계속 한 걸음 내딛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은 그때 구매했던 책 중에 몇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점이다. 최승자 시인의 시집과 카프카의 소설은 결국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한 채 미국에 올 때 처분하였고, 그나마 미국에 가져온 이성복 시인의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은 첫 50페이지 정도 읽고는 책장 속에서 자고 있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나에게 이성복, 최승자, 카프카를 알려준 낯선 이의 책장을 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전율과 동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중요한 것은 책과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 연대하여 체감되는 거대한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르는 사람의 책장을 계속해서 훔쳐보고 있다. 저것이라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다양한 목적지를 계속해서 엿보고 있다. 나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