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정해놓은 관습과 규범은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을 지배한다. 물론 이는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먹는 음식에 대한 기준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의무, 혹은 남녀가 서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을 건드렸을 때 사회의 반응은 역린과 같아서, 때론 입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사회에서 따돌림이나 비난을 당할 수 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야 그러한 상황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예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그 사회의 관습 및 규범을 뛰어넘는 사고가 오히려 더 큰 능력으로 각광받기도 한다.
소설은 크게 세 사람의 시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시각은 같은 사건의 다른 해석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은 계속된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을 되짚어보는 가운데, 특정 사건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엊그제 본 영화 ‘아가씨’도 그렇지만 서사에 있어 이처럼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문득 프랑스 인상파 화가였던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루앙 성당’ 작품들이 떠오른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이 일련의 같은 개체를 그린 그림은 아침, 한낯, 해질녘, 흐린 날, 갈색의 하모니 등 30개가 넘는 다양한 시각의 작품이 존재한다. 과거 화가들은 ‘사물이 있는 대로’ 그렸던 것에 반해 이 인상주의 화가들은 ‘자기가 보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어떠한 개체가 있다 하더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한 ‘인물’의 시각도 변하기 마련이다. 사실 이 색;color라는 것도 실은 어떠한 물체가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산물이다. 이것이 우리 눈의 망막에 맺히고, 망막에 맺힌 상은 시세포 및 시신경을 거쳐 대뇌에서 인식하는 것이지 않은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인간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 하나의 ‘인간’이라 할 지라도 시간과 공간, 혹은 자기 신체 컨디션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로 태어난 우리의 본성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식물로 되어가길 원하는 이 작품의 주인공, 영혜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옷이 벗어진 상태에 안정감을 느끼고, 즐기던 육식을 그만두고 시간이 흐르며 물만으로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이 영혜를 말이다.
총 세편의 중편소설 중 첫 번째 소설인 ‘채식주의자’에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 영혜에게 폭력적으로 채식주의를 중단할 것을 종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두 번째 소설인 ‘몽고반점’에선 그 사회의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는 두 남녀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무 불꽃’에선 정신병원에서 스스로 나무가 되어가려 하는 영혜와 그 주변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돌보는 그녀의 언니 인혜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문득 정상이라 여겨지는 우리의 일상, 모두가 같은 시각으로 하나의 대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을 종용하는 세상이 떠오른다. 누군가의 관점 하나만이 이 사회의 정답일 리 만무하지만, 이 지구라는 땅 위에 칠십억 명의 인구가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을 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이드라인은 분명 우리 인간 개인의 본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혹은 어느 곳에서까지 그 본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것인지, 어쩌면 그 본성을 숨기고 사는 것이 우리의 ‘본성’인지. 곰곰이 되돌아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의 문장으로 끝을 맺어 본다. 오랜 금식으로 인해 내장이 퇴화되어 급속히 쇠약해가는 동생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대고 언니 인혜가 하는 말이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p.221”
채식주의자, 한강 연작소설, 창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