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퀘벤하운 Nov 03. 2016

아이와 바둑 두기

큰아이가 바둑학원을 다닌 지 어언 2개월, 난데없이 스스로 바둑학원 전단지를 보고 다닌다고 하더니 재미있다고 벌써 책을 세 권이나 떼었다고 한다. 평일 연차휴가라 과연 이 녀석이 진짜 바둑학원에서 바둑을 두는지, 아니면 알까기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번 둘러봤다. 과연 집에선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녀석이 차분히 앉아 바둑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집 밖에서 아빠를 보면 막 반가워서 안기던 녀석이 아빠를 보고도 눈인사만 하고 다시 바둑에 집중. 이쯤 되면 무언가 뿌듯함도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런 아이가 바둑판을 사달라고 한 지가 어언 한 달이 넘었다. 상기 언급한 광경을 고려하면 오동나무 바둑판 원 세트를 장만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지만, 일단 아내님의 만류로 마트에서 휴대용 바둑판과 바둑알을 사서 집에 왔다. 그런데 바둑판을 보더니 난데없이 큰아이는 바둑을 두자고 결투신청을 하는 게 아닌가. 평소 똑똑한 게 매력이라 결혼했다는(물론 똑똑하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ㅋ) 아내는 나에게 어서 결투를 받아들이라며 성화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바둑을 배워본 적은 없으나, 운동경기 관람하는 것처럼 혼자 바둑중계는 몇 번 본 적이 있고, 신문에 나오는 바둑 코너를 종종 주의깊에 읽은 게 고작이었다. 즉, 바둑을 제대로 두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것. 두둥~


사실 아무리 그래도 초1인데, 상식적으로만 두어도 이기겠지 하며 포석을 깔기 시작했다. 우상귀에서 전투는 시작되었는데, 전투는 시작되자마자 나의 완패로 끝났다. 바둑을 전혀 알지 못하는 채 관전하던 아내는 일그러진 나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언가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쯤에서 불계패를 던지고 유유히 방으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래도 응원하는 아내의 눈빛을 바라보며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새로운 전장을 좌하귀에서 시작했다. 다행히 역시 아직 어린 아이라 그런지, 신중히 수를 읽다 보니 이 녀석도 실수하는 게 생기기 시작하더라. 아울러 대국(?)이 중반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니 어른과 아이 집중력의 차이도 발생하고.


결국 승리했다. 승리를 하고 힘찬 포효를 하는데, 옆에서 아내가 또다시 어이를 상실한 표정을 짓더라. 초등학교 1학년생을 이겨서 그리도 좋으냐고. 좋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아비의 자존심을 지켜낸 이 기념비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런데 진 아이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어떤 부분에서 악수를 두었는지, 다시 두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둥의 복기를 하는 게 아닌가. 아비로서 의문의 1패를 당한 느낌이었다. 앞으로 이 녀석이 바둑학원에 다니면 다닐수록 내가 이길 확률은 지극히 낮아지겠지만, 이 아이의 진지함이 늘어날수록 아비로서 느끼는 뿌듯함은 높아질 것만 같다.


아이가 태어난 후, 지난 7-8년의 시간은 아이의 신체적 발달에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다. 헌데 이제부턴 이 아이의 지적 발달이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 무리해서 강요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자신의 두뇌를 키워가는 과정은 옆에서 최대한 조력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성장하는 지적능력 속에 세상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나지 않겠는가. 끝.

매거진의 이전글 오지랖의 넓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