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조갑제, 조갑제닷컴, 2015
본디 1986년 한길사를 통해 출간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훌륭한 책이란 평을 받고 있다. 나는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가 쓴 ‘지연된 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책인데, 이 지연된 정의란 책은 요즘 개봉한 영화 ‘재심’의 모티브가 된 책이기도 하다. 절판된 줄 알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페이스북을 통해 재출간이 된 것을 알게 되었고, 고맙게도 지인 덕택에 빌려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책은 전체적으로 ‘지연된 정의’와 그 맥락은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다만 지연된 정의는 2000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이 책은 1974년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그만큼 고문이나 법의 집행 수위(사형)가 조금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지연된 정의’는 다행이나마 그 ‘정의’가 뒤늦게라도 발현되는 것이지만, 이 책의 오휘웅 씨는 이미 책을 쓴 시점인 1986년에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살아진 지 오래인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맥락이 유사하다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연된 정의에서 공권력에게 불이익을 받은 분들과 본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책의 389페이지를 인용해 보자면, “1. 오판의 희생자들은 사회적 약자가 대부분이고, 2. 변호인의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3. 공범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물고 들어가 빼도 박도 못한 경우가 많고, 4. 수사 시간을 벌기 위해 별도의 범죄사실을 찾아내 일단 구속시켜놓는 별건 체포의 경우가 더러 있으며, 5.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현장 상황과 부합이 안 되는 진술이 되풀이되다가 정리되고, 6. 범행도구 등 증거물은 없어도 만들어내며, (후략)” 등이 될 수 있다. 이는 사실 세계 어느 나라의 오판 사건에서나 나타나는 범인 조작의 조건이라 한다.
조금 더 메커니즘 적으로 들어가 보자면, 범인 조작의 공식은 다음과 같다.
“고문->허위자백->공범 지명 유도->공범 구속->범행 도구 조작->범행 상황 조작->검찰 송치->공판->피고인에게 유리한 증인 협박, 증언 변경 강요->1심 오판(유죄 선고)->2심 오판(유죄 선고)->3심 파기 환송->2심 무죄 선고->확정, 363쪽”
여기서 오휘웅 씨 사건은 3심에서도 유죄가 선고되어 형장의 이슬이 된 것이고, 때로, 아주 드물게 다른 사건은 3심에서 파기 환송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책으로 한국 사법부와 경찰 시스템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밝혀낸 조갑제 기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7년이라는 현재에도 영화 ‘재심’과 같은 영화가 여전히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해 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반대급부적으로 이러한 기자나 변호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사회는 여전히 얼마나 강압적이고, 강자들만 살아남는 사회가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사실 판사도 어디까지 사람이고, 검사나 형사들도 다 자기 생활이 있고 감정의 기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판을 하고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러한 책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이런 휴먼에러는 완전히 소거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 양심과 확신이라는 이름을 조금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확신을 가지고 선악을 구분하고 재단하고, 처벌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옳을 수도 있지만, 때론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농후하다. 책의 430페이지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양심과 확신이란 이름 아래서 오판을 한 판사들이나, 인류 역사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중세의 기독교, 로베스피에르, 히틀러, 레닌으로 이어진다. 확신 없이 인간을 도륙한 정치인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확신처럼 무서운 전율은 없다.”
6년 전쯤, 금태섭 의원(당시 변호사)께서 쓰신 ‘확신의 함정’이란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분의 전작인 ‘디케의 눈’과 이 책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항상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나의 일상생활에서도 조금 이어진다. 나는 내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기록을 하려 노력한다. 업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말로 설명한 후, 다시 이메일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며, 업무일지를 엑셀로 매일 쓰며 중요한 사건은 항상 기록하는 습관을 들인다. 현장에서 근무할 때에는 야장이라는 조그만 수첩을 매일매일 열심히 썼는데, 그러한 기록들은 생활의 작은 알리바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는 일주일이나 한 달만 지나도, 나의 기억과 조금은 상이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다.
간혹 적폐 청산, 이전 대통령 구속, 재벌 총수 구속, 등등 말만 들어도 시원한 발언을 하는 정치인들이 눈에 보인다. 반면 관념적인 단어를 사용하며,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 등의 고구마 같은 발언을 하는 정치인들도 보인다. 물론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전자보다 후자에 매력을 더 느끼는 편이다. 자, 여기서 판사가 짧은 검토시간으로 인해 사건을 오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아무리 짧은 검토시간이라 할지라도 판사는 수천 장 수만 장의 자료를 검토할 것이며, 다양한 증인 및 관계자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형사사건이라면 검사와 변호인단의 입장을 충분히 들어볼 수 있을 것이며, 그 후 내리는 결정이 사법부의 판단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1심과 2, 3심을 통해 잘못되었다면 다시 정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을 믿지 못하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누구누구 구속시키고, 다 감방에 넣어버리겠다는 정치인은 앞서 언급한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저 사법부의 판단도 필요 없이 다 나쁜 놈들은 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쳐 넣어지는 사람이 언젠가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리핀의 두테르테나 터키의 에르도안은 결의에 차 있고 정의를 위한다 할 수 있지만, 그러한 독단적 결정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선의의 국민들도 상당할 것이다. 복잡 다단하고 현대화된 사회에 있어서 어느 누군가의 확신, 누군가의 양심에 따라 사법시스템을 초월한 결정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서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끝부분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오휘웅 사건은 인간의 판단능력이 갖는 한계와 함께 인식능력의 한계도 보여준다. 진실이란 말은 좋지만, 인간이 과연 진실을 입증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사건엔 객관적 진실이 없다. 주관적 진실만 있을 뿐이다. (중략) 우리 사회에서 진실이 진실로서 통용될 수 있으려면 객관적으로 증명된 진실이어야 한다. p.431”
*이 책은 조갑제 기자의 리즈시절 탐사보도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감탄해 마지않지만, 그것이 현재 내가 조갑제 기자의 현재 성향에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수구꼴통의 언론이라 치부하는 분들의 논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언론이라 함은 본디 바라보는 시야가 다를 수 있을지언정, 사실에 대한 적시는 대형 언론사로 갈수록 그 신뢰도는 높아진다고 간주될 수 있다. 이는 대형 언론사의 직원수, 연봉에 따른 인센티브의 차이, 혹은 시스템의 차이일수도 있다. 나는 조중동 및 한겨레, 경향, 그리고 여러 경제신문들을 보지만, 어느 쪽의 논조가 항상 맞다고 보지는 않는다. 사람이 하는 일이 때론 맞을 수도, 때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지루한 말문을 다는 이유는, 저자가 조갑제 씨란 이유만으로 이 책을 읽기 주저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일개 소시민으로서, 조갑제 기자나 박상규 기자, 박준영 변호사와 같이 몸으로, 그리고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분들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