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 전 발레리 줄레조라는 프랑스의 지리학자는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을 출간하며, 서울의 기형적인(?) 주택시장에 대해 신랄한 분석과 함께 향후 서울의 아파트는 하루살이에 불과할 것이란 결론을 낸다. 다음은 그 책의 결론부의 일부.
"주택이 유행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결론적으로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p.251"
이 분은 책의 전개에 있어 파리의 아파트를 서울의 아파트의 미래와 같이 이야기해 나간다. 나도 십여년 전 파리를 다녀온 적은 있지만, 파리에서의 그 아파트의 모습은 그 왜 영화 13구역의 칙칙한 분위기가 그대로 연출된 빈민가에 가까운 분위기다. 그럴수밖에 없는 이유는 파리의 대부분 아파트들은 70-80년대 지어진 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공공임대주택이기 때문이다.
얼마전 화재가 난 런던의 그렌펠타워 역시 공공임대주택이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민간이며, LH나 SH와 같은 공기업이 지었다 하더라도 분양을 통해 소유권을 이전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아파트 주거민들은 자체적으로 관리비를 납부하며, 그 관리비 안에서 장기수선충당금을 통해 유지보수를 하며, 수십억원의 예산이 필요한 엘리베이터 개보수 및 지역난방시설 개보수도 실시한다. 청소용역도 원활히 이루어져, 때로 우리 아파트의 계단을 걷다보면 그 반짝반짝한 계단의 홈에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많은 분들이 주거문화 개선을 위해 공공임대방식을 선호하지만, 공공임대방식도 정답이 될 수는 없는게, 아무래도 내 것이 아니고, 국가 혹은 지자체 등의 제3자의 소유이고 관리가 되다 보니, 이것에 대한 관리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점이 수반된다. 물론 예산이 아주 넉넉하여 그러한 공공임대주택에 많은 돈을 들여 유지보수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앞서 언급한 파리와 런던의 예와 같이 그것은 제한된 요인에 의해 조금 어려운 편이다.
다시 발레리 줄레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서율의 아파트와 파리의 아파트는 그 성격이 태생적으로 상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발레리는 책에서 앞으로 내구연한이 다해 재건축의 시대가 오면 어쩔 것이냐고 반문했지만, 강남 재건축의 시대를 지나고, 이제 강북 재건축의 시대가 오는 이 시점에서 국가는 오히려 그 재건축을 규제하고 있지 해달라고 사정하고 있지는 않는다.
만약 그 은마아파트나 반포주공 등이 공공임대아파트였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안전진단은 안 좋게 나오고, 서울시는 예산이 부족하다고 하고, 정부는 돈많은 지자체는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고, 그런 지리한 공방 속에 30년, 50년이 되는 아파트들은 속출하게 될 것이다. 1천세대만 되는 아파트를 재건축하려고 해도 줄잡아 3-4천억원은 드는데, 이게 1만세대로 가면 3-4조원이 드는 메머드사업이 된다. 예산으로 처리하기 불가능한 수준이다.
다행히 은마아파트나 반포주공의 입주민들은 재건축하여 자산을 리뉴얼할 요인이 있고, 건설사들은 그 입주민들의 자산을 빌리고, 신규분양이라는 인센티브를 가지고 재건축을 하게 된다. 이렇게 노후주택의 멸실+추가신규공급을 통해 우리는 윤택한 주거환경을 가지게 된다.
얼마전 실리콘벨리 사과공장을 다니시는 분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실리콘벨리에 처음 온 분들은 그 높은 렌트비에 깜짝놀라고, 그 낮은 퀄리티에 또 한번 깜짝 놀란다고 한다. 월세 4백만원이 조금 넘는 집에 가보면, 많은 한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들어간 집에는 개미와 두더지가 많아, 그것 또 처리하는데 몇백만원. 세입자이니 집소유주와 반띵으로 처리하고 한다드라.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실리콘벨리에 분당급 신도시가 생기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지방사람들은 그닥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모 용적률제한을 조금 풀고 싱가포르 콘도미니엄과 같이 대규모 고층주거단지를 만들고 단지 안에 수영장 및 괜찮은 퍼실리티를 넣으면 수요가 있지 않나 싶다. 헌데 어제 다른 캘리포니아 이야길 들어보니, 그 지역은 또 그 각종 토지이용규제 등으로 개발이 쉽지 않다고 한다. 개발이 안되면 좋은게 아니냐고.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서부해안도시들은 지난 5년간 주택가격이 75% 가량 상승했다고 한다.
서울의 아파트를 보며 조금 한숨짓고 답답하게 여길수도 있다. 하지만 인구밀도가 1km2당 1만명이 넘어가는 대도시에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양질의 주거와 적정가격의 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장 최적화된 제도가 아닌가 싶다. 아래 주택 실질가격 인덱스 추이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지난 20년간 한국은 비교적 주택가격의 등락이 높지 않음을 알 수 있다. Nominal 이 아니고 Real terms 임을 감안해서 보라.
선진국과 비교해서 그렇다고? 인도나 중국으로 가자면 그 부동산가격의 폭등은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주택이 유행상품처럼 거래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택이 관리가 잘되며 재건축도 원활히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게 공공재의 성격이 너무 강조되다보면 국가예산으로 유지관리 하기도 어렵고, 내용연수의 도래로 재건축을 할 시 요인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럼 고담시티가 될 것이고.
나는 점점 그 한국의 괜찮은 제도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건강보험과 저렴한 전기, 수도, 교통 등 인프라요금, 그리고 서울의 낮은 건폐율의 아파트가 그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복지제도를 비롯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지만, 높은 인구밀도에서 다같이 잘 살기 위해선 민간아파트와 같은 지속가능한 제도는 잘 유지되야지 않을까. 아파트 공화국은 그런 의미에서 좋은 뜻으로 쓰여야지 싶다. 소수의 부자는 1층짜리 건폐율 70-80% 먹어가는 저택에서 살며 빈민은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파리보다, 다수의 중산층이 건폐율 15-20% 짜리 녹음이 우거진 아파트에서 거주하는 서울이, 나는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개인의 생각이고, 각자 환경에 따라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있다고 본다. 그냥 토요일 오전에 아파트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하는 어느 아재의 잡썰로 봐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