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탄만두 Jun 07. 2019

피아노 계단을 밟으며 기획자가 된다


새로 옮긴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 역 안에는 피아노 계단이 있다. 계단을 한 발 한 발 딛고 올라설 때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피아노 소리가 난다. 발걸음에 맞춰 불빛도 번쩍번쩍한다. 여러 명이 밟고 오르내리기 때문에 그 피아노는 매 순간 랜덤한 멜로디를 만든다. 


요즘 나는 이 계단을 매일 밟고서 흥얼거리며 출근하는데 맛 들렸는데, 오늘은 재미있는 관찰을 했다. 몸이 반쯤 구겨져있던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함께 쏟아졌고, 카드를 찍고, 계단으로 향하는데, 내 앞에 약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전부 피아노 계단이 아닌 일반 계단 쪽을 향해 몸을 옮기는 것이었다. 피아노 계단은 완전히 텅 비어있었다.


내가 푸학 하고 웃은 이유는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딱 저렇게 일반 계단을 밟고 오르락내리락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이유로는 피아노계단 한 번도 안 밟아봐서 부담스러워서(큭큭), 약간 부끄러워서 (대체 뭐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몸을 더 틀어야 올라설 수 있는 일반 계단으로 향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피아노계단을 만든 사람의 의도가 전혀 먹히지 않아서 웃기고 슬퍼서 터졌다. 반대쪽으로 가던 사람들이 혹시 나처럼 부끄러워서 저러나 해서 슬금 또 터졌다. 


계단을 한 번이라도 더 밟고 싶게 만들기 위해서 고심했을 누군가의 의도와는 달리 (첫 출근 주간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일반 계단을 밟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재미있으라고 더 밟으라고 만든 건데 왜 안 밟아 주나요. 기획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혹시 알게 된다면 무슨 기분일까. 


오늘따라 한 명도 없던 피아노 위에 나는 발을 올렸고 첫 멜로디를 찍었다. 내가 솔까지 밟았을 때 누군가 새로운 멜로디를 찍었고 맞춰서 나는 흥얼거렸다. 오늘은 금요일이기도 했고 방금 들은 그 생각이 기획자의 기분을 생각해본 첫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계속 에디터였어도 그 생각했을까. 


달력에 표시해 둔 <새 회사 첫 출근>이 d+25일이 되던 날. 그렇게 나는 편집자에서 기획자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고 있었나 보다. 앞으로 어떤 기획을 하더라도 아마 피아노계단을 밟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오늘은 잊지 못할 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매거진의 이전글 요가를 배우면서 단단해진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